누나의 숨겨둔 보따리 속에 있던 교과서

[책 그리고 기억들] 누나, 아버지...책을 건네던 사람들

등록 2006.11.01 15:18수정 2006.11.06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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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하나

누나는 조금 모자랄 정도로 순진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 잠시 외갓집에 살 때였다. 외할머니는 70년대 초 큰 목욕탕을 운영했다. 제법 살림살이가 좋은 편이었다. 일할 사람이 많이 필요했다. 고향인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입하나 덜 요량으로 먼 친척아이들이 와 일을 했다.


a 초등학교 입학 때 선물로 받은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몇 권 남지 않았다.

초등학교 입학 때 선물로 받은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몇 권 남지 않았다. ⓒ 나영준

그 중에서 나와 동생을 끔찍이도 아끼던 사람은 누나였다. 고등학교에 다녀야 할 나이였다. 고생스럽게 일해도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지만 종종 사고를 쳐서 문제였다. 동생의 귀를 파준다고 하다 고막을 건드려 병원에 달려가게 만들더니, 기어이 미용실 '시다'로 일하던 친구에게 동생을 들쳐 업고 놀러가 다음 날 새벽 통금이 풀려서야 돌아왔다.

집 안이 발칵 뒤집어졌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외할아버지에게 호된 따귀 한 대를 맞고 말았다. 누나는 소리죽여 울었다. 어스름 새벽안개 속 찬물에 세수를 하는 모습을 훔쳐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빨래비누를 쓰던 것이 잊히질 않는다.

누나는 틈만 나면 방에 나를 불러들여 소꿉놀이를 하며 놀아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보따리에 소중하게 감추어둔 것을 풀어놓았다. '초등학교' 교과서였다.

"누나는 이걸로 공부했었다. 인제 돈 많이 벌면 나도 학교에 다시 다닐 거다. 그러면 영준이 책도 많이 많이 사 줄게."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누나가 어설프게 "철수야, 노올자. 어.머.니.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를 읽어주며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신기한 듯 바라보는 나를 소중히 안아주었다. 엄마 품보다 따스하다고 느껴졌다.


누나는 얼마 후 친구가 다니던 미용실로 짐을 쌌다. 누나가 떠나며 아끼던 교과서를 주었다. 공부 열심히 하면 자주 놀러 오겠다고 했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듬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교과서를 받아들자 책 속에 영희가 누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후 어머니가 길에서 누나를 만났다고 했다. 누나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다. 당황스런 눈치라고 했다. 어울리지 않는 짙은 화장을 했고, 옷 입은 폼이 '꼭 양공주 같다'고 했다. 그래도 내게 가장 먼저 책을 건넨 사람은 누나였다.


기억 둘

a 가족, 세월 그때의 부모님보다 나이가 많아져 버렸다.

가족, 세월 그때의 부모님보다 나이가 많아져 버렸다. ⓒ 나영준

"어머, 여보! 얘는 도대체 누구예요?"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70년대 후반 무렵, 초등학교 3학년 혹은 4학년 때였다. 퇴근하신 아버지가 내 또래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불쑥 나타나셨다.

"이 애가 집이 충북 음성이래요."

아버지는 태연자약하셨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껌을 팔고 있는 아이에게 '부모님이 계시냐. 어쩌다 이런 일을 하게 됐느냐' 등을 묻다가 터미널 근처에서 모르는 아저씨를 따라 서울행 버스를 타게 됐다는 이야기를 듣자 무작정 손을 끌고 내렸다고 했다.

아이의 몸에서는 참기 힘들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났다.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세수라는 것을 하기는 할까 싶었다. 몸에 걸친 것은 옷이라기보다는 기우다만 헝겊 쪼가리에 가까웠다. 아이는 두려운 듯 연신 두 눈을 껌벅거렸다.

"그래서 당신이 이 애를 집에 보내주겠다고요?"
"응 집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더라고.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우선 목욕물 좀 데워요. 씻기고 밥 좀 먹입시다. 영준이 남는 옷 좀 가져오고."

따뜻한 밥을 지어먹이자 아이는 거짓말처럼 쉽게 잠이 들었다. 아버지는 "내 자식이 길을 잃고 저런다고 생각을 해보라"며 화가 덜 풀린 듯한 어머니를 달랬다. 당시는 껌을 팔거나 구걸을 하는 어린아이, 청소년이 흔했다. 그런 아이들을 지나치지 못한 다는 게 아버지의 단점이었다. 퇴근길 길가나 버스에서 아이들을 불러 세웠고 집이 어딘지를 물었다. 그리곤 곧장 집에 데려왔다.

그 후로도 두어 달에 한 번, 아버지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에 들어섰다. 남녀를 가리지 않았고 때때로 중학생 나이의 누나나 형이 문턱을 넘기도 했다. 나중에는 어머니도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셨는지 싫은 기색 없이 문을 열어주셨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히고 하루를 재운 다음날 아침이면 서울역이나 버스터미널에 데려가 차표를 끊어주고 여비를 쥐어주었다. 집에 갔는지 안 갔는지 꼭 연락을 하라했고 실제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라는 편지나 전화가 부모님들에게 오기도 했다. 그런 일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계속됐다.

나는… '대찬성'까지는 아니었지만 어렴풋이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좋은 일이다'라고 생각 했다. 물론 거기까지 만이었다. 그 아이들이 혹시나 내 물건을 만질까. 내가 아끼는 것들을 망가뜨리진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아버지는 그런 기대를 무참히 짓밟곤 했다. 데려온 아이들에게 학교는 언제까지 다녔나를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몇 년 맛만 본 경우가 허다했다. 더욱이 가정형편까지 들어보면 아이가 무사히 돌아간다 해도 다시 학교에 다닐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그런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혹 학교에 다니지 못해도, 책만큼은 열심히 읽어야 한다"며 내가 그토록 아끼던 세계명작전집이나 위인전 따위를 몇 권씩 싸주곤 했다. 차마 아버지 앞에선 말을 못하고(어렸을 땐 꽤나 무서워했다) 돌아서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고 통음에 젖기 일쑤였다. '저 사람은 친아버지가 아닐 거야'라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어느 날 이었다. 그날도 아버지는 책을 몇 권 가져가겠노라고 말씀하셨다. 대답을 못했다. 억울했고 슬펐다. 재차 무어라 이야기를 하셨지만 도통 귀에 들리지 않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자 눈물이 흘러넘쳤다. 아버지는 잠시 내려다보시더니 머리를 쓰다듬으셨다.

"책은 나누는 거다. 게다가 넌 이미 몇 번씩이나 읽었잖니. 앞으로도 많은 책을 접할 거고. 너나 저애나 책을 많이 읽어야할 나이다. 이 시기, 어쩌면 저 아이에겐 지금 이 책이 마지막일수도 있다. 네가 양보해라."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처 흐르는 눈물을 닦기에 바빴다. 밤새 몸을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세월이 흘렀다.

기억 셋

대학시절까지 이성에게 숫기가 없었다. 관심 있는 여학생들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 힘들어 먼발치에서 지켜보곤 했다.(물론 지금은 '선수'가 다 됐다) 생일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구실이었다.

예쁜 책을 골라 첫 장을 열고 사연을 적었다. 미문(美文)에의 집착이었다. 차마 직접적인 표현도 못하고, 내가 써놓은 그 이상의 의미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망상에 빠졌다. 상대방이 책을 읽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알아주길 원했다. 한 권의 책이 전해주는 본질적 가치 따위는 관심이 없었다. 작업선물의 한 종류로 이용했을 뿐이다.

천천히 눈을 감는다. 누나가 웃으며 달려오는 것 같다. 힘들게 우리 집 문지방을 넘던 아이가 떠오른다. "이걸 네가 읽었으면 좋겠어"라고 웃으며 책을 넘기는 장면을 상상한다.

나눈다는 것, 그 사람이 읽고 행복해졌으면 하는 마음. 누군가가 내가 준 책 한 권으로 미소 지을 수 있다면, 그 누군가를 위한 책을 건넨다면 아버지는 비로소 편안하게 웃음 지으실지 궁금해진다.

안방 너머에서 아버지는 골골 소리를 내며 곤한 잠을 주무신다. 고개를 돌려 책장을 바라본다. 내가 가진 책, 한권 한권을 다시 살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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