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동검. 좌측 극의 날에 진시황릉임을 알 수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오창학
유물 전시실에 구리로 만든 진나라의 극(戟)이 따로 전시되어 있다. 날 한쪽 편에 '3년상방여불위조사공구(三年相邦呂不韋造寺工口)'라 새겨진 명문으로 인해 병마용갱이 진시황릉의 부장품이라는 게 확실해진, 의미 있는 유물이다.
"여불위가 승상이 된 지 3년에 사공구가 만들었다." 이문을 따진다면 사람 장사가 제일이라던가. 인신매매 말고, 사람에 투자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역대 고금을 통틀어 정치하는 사람 주변엔 꼭 장사치들이 '투자'를 위해 꼬이는 것인가?
조나라 수도 한단에 인질로 와 있던 진나라 왕족 떨거지 '자초(子楚)'에 대한 여불위의 투자전략은 주효했다. 물론 안국군(효문왕)의 총애를 받던 화양부인에게 막대한 재물을 부어 기어이 자초를 왕위에 앉힌 노력이 뒤따랐기 때문이지만.
후계자가 된 자초에게 자신의 아이를 가진 첩을 자초의 아내로 맞게 했고, 그 사이에 태어난 이가 훗날의 시황제 영정(令政)이다. 자초가 즉위(장양왕) 후 3년 만에 죽자 자초의 보좌관 여불위는 승상의 자리에 올라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시황제의 섭정이 된다. 결국 섭정 10년 만에 시황제의 친정 기도로 끌어내려 져 죽음에 이르는 최후를 맞았다.
'승상이 된 지 3년'이라 새겨진 이 무기는 시황제 즉위 초 여불위 권력의 초 절정기에 능 공사가 시작되었다는 점, 당시 진나라 청동병기 제조 기술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증거물이다.
병마용에서 발굴된 동검도 당시의 야금수준을 짐작하게 하는데, 2200년 간 땅에 묻혀있던 청동검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깔끔하고 예리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발굴 직후 연구원이 책상 위의 종이뭉치를 그었을 때 19장이 베어졌다고 하니 그 예리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