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망명을 꿈꾼다

[取중眞담] 탈북자들이 '탈남'까지 생각하는 이유는

등록 2006.10.26 10:39수정 2006.10.2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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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북한 이탈주민 정착 지원 시설인 경기도 안성의 '하나원' 경내의 조병화 시인의 시 <이 집은>이 새겨진 기념석.

북한 이탈주민 정착 지원 시설인 경기도 안성의 '하나원' 경내의 조병화 시인의 시 <이 집은>이 새겨진 기념석. ⓒ 오마이뉴스 김당


북한 이탈 주민 정착 지원 시설인 경기도 안성의 '하나원'에 들어서면 고(故) 조병화(1921~2003년) 시인의 시가 새겨진 큰 바위가 눈에 띈다. 안성 출신인 조 시인이 고향에 탈북자 정착 지원시설이 들어선 것을 기념해 쓴 시 '이 집은'이다.

이 집은, / 자유를 찾아 / 공산 이데올로기의 거센 장벽을 넘어서 / 삶을 갈구하며 모여든 / 용감한 사람들이 내일을 모색하며 / 꿈을 기르고 있는 집 //

오, 신(神)이여 / 이분들에게 행복과 안식을, / 찾아온 조국의 따뜻한 사랑을, //

그리하여 인간이 인간답게 / 살아갈 수 있는 큰 꿈, / 그 용기와 희망, 투지를 내려주시고//

자유, 평등, 사랑, / 이것이 골고루 이 나라 온국민들에게 / 깊이 뿌리 내려 / 평화와 번영이 살아숨쉬는 지상의 낙원, / 그 조국이 되어, 그 조국에 / 밝은 내일을 열어주소서 //

이 집은 꿈이 사는 집.


2/3가 '차별과 따돌림' 때문에 탈북자라는 사실 숨긴 적 있다


그러나 낯선 '새터민'보다는 흔히 부르는 '탈북자'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이들에게 조국의 현실은 따뜻하지도, 행복과 안식을 주지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큰 꿈을 주지도 못하는 것 같다.

이런 결론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소속 최재천 의원(서울 성동갑·열린우리당)이 25일 발간한 '재외탈북자의 인권침해 실태와 보호방안' 제목의 국정감사 정책자료집의 토대가 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른 것이다.


최재천 의원실은 지난 9월 10일~10월 10일 동안 탈북자 17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이 가운데 159명으로부터 답변을 받아 '탈북자 그들의 이름은 동포입니다'라는 부제를 단 정책자료집을 펴냈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에 온 탈북자들은 대부분 식량난으로 먹을 것을 구하거나(58%) 북한의 정치적 탄압을 피하기 위해(24%) 탈북한 것으로 응답했다. 그러나 한국에 정착한 이들의 1인당 한 달 평균 수입은 '50만원 이하'라고 응답한 사람이 67%나 된다. 당연히 이들은 자신의 생활 형편이 '못사는 편(40%)'이거나 '아주 어렵다(26%)'고 답변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사회적 차별이다.

남한에 정착한 이후 본인이 탈북자라는 사실을 숨긴 적이 있다고 응답한 탈북자는 59%(94명)인데, 놀랍게도 그 94명 전원이 탈북자(새터민)임을 숨긴 이유를 '차별과 따돌림'이라고 응답했다.

다만 '취직하는 데 차별(68%)' '거주지에서의 차별(16%)' '직장에서의 차별과 따돌림(9%)' '학교에서의 차별 및 따돌림(7%)' 등으로 차별을 걱정하는 '장소'만 다를 뿐이다.

당연히 탈북자에 대한 지원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야도 취업과 차별에 집중되어 있다. 안정적인 취업을 위한 대책 마련(38%)과 차별없는 사회 분위기 조성 노력(22%)에 이어, 심지어 탈북자 차별 기업 및 단체에 대한 제재 조처(20%)가 그 뒤를 이었다.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에서 '서울은 망명을 꿈꾼다'로

그래서 이들 가운데는 무려 38%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나라에 망명을 신청할 생각이 있다고 응답했다. 이들이 한국을 떠나고 싶은 이유는 역시 대부분 차별(50%)과 취업난(34%) 때문이다.

놀랍게도 망명을 꿈꾸는 탈북자 가운데 1순위로 정착을 원하는 나라는 이들이 북에서 평생 '철천지 원쑤의 나라'로 세뇌받은 미국(72%)이다. 중국(16%)과 일본(7%)이 멀찌감치 떨어져 그 뒤를 이었다. 망명국을 선택한 이유 역시 ▲차별이 없기 때문(30%) ▲취업이 좀더 쉽기 때문(25%) ▲인권 보호가 잘 되어 있기 때문(18%)이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탈북해 '북한 총리의 사위'라는 신분 때문에 요란하게 입국한 강명도씨는 지난 95년 서울에서 <평양은 망명을 꿈꾼다>는 책을 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상당수의 탈북자가 미국 망명을 꿈꾸는 현실은 '서울은 망명을 꿈꾼다'로 비유된다.

2006년 8월 현재 국내 입국해 거주하는 탈북자는 8590명쯤이다. 이들의 인구 특성은 여성이 73%이고, 20~30대가 60%이다. 2002년 이후에는 매년 1천명 이상이 입국하는 추세이다.

이들에게는 97년에 제정된 북한이탈주민의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전국 46개 고용안정센터를 통한 취업상담 및 알선이 이뤄지고 새터민 채용 사업장에는 고용지원금이 주어진다. 그러나 1년 이내 50만원, 1~2년 이내 70만원 이하로 지급되는 고용지원금을 타려고 새터민을 채용하는 기업을 찾기는 쉽지 않다.

탈북자의 취업경로 가운데 정부의 고용안정센터 이용은 9%뿐(본인 구직 36%, 친구 소개 29%, 노동부 9%, 신변보호관 소개 7%)이라는 '하나원'의 설문조사 결과는 고용지원정책의 실패를 입증하는 것이다. 또 <월간중앙>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 탈북자의 61.4%가 실업자이고 취업자 가운데도 정규직은 16.7%뿐이었다.

흔히 새터민과의 공존은 통일의 준비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새터민 지원 시스템의 노하우 축적은 궁극적으로 통일비용의 절감으로 이어질 수 있다. 국내 유일의 북한 이탈 주민 정착 지원 시설인 '하나원'과 거기서 적응훈련을 받은 새터민의 배출 과정은 실패없는 통일을 위한 일종의 '파일럿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더는 망명을 꿈꾸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차별없는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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