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애틀에 없는 폭력 왜 제주엔 있나

[取중眞담] 어느 전경 어머니의 편지와 편파보도

등록 2006.10.27 15:11수정 2006.10.27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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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24일 낮 제주 서귀포시 중문단지 입구 천제연교 부근에서 한미FTA 협상 저지 결의대회 참가자들을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방송차를 향해 경찰들이 방패와 진압봉을 휘두르며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자를 폭행하고 있다.

지난 24일 낮 제주 서귀포시 중문단지 입구 천제연교 부근에서 한미FTA 협상 저지 결의대회 참가자들을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방송차를 향해 경찰들이 방패와 진압봉을 휘두르며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자를 폭행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전경 아들을 둔 에미입니다. 영상매체에서조차 편파적인 보도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쪽에 치우쳐 보도함으로써 당사자는 물론이고, 그 가족들까지도 상처가 된다는 것을 유념해 주시길 바랍니다."

한미FTA(자유무역협정) 4차 협상이 시작된 23일 어느 전경 어머니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공정보도를 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공정보도는 기자로서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입니다. 하지만 간혹 감정에 휩쓸릴 경우 공정보도 원칙을 스스로 깨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시위현장 취재 과정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지곤 합니다. 자신이 본 것을 과장해서 기사화하거나 또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사실'을 기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위현장에 나설 때마다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자신이 본 것과 혹은 본 것 뒤에 숨은 진실만을 가려내 보도하자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이념적으로는 '누구의 편'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느 둘이 맞서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현장에서는 누구 편에 서서 이를 바라봐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가급적 차분하게 사실만 전달하려했지만...

협상 첫날인 23일부터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1신, 2신, 3신…. 현장상황이 돌변할 때마다 가급적 차분하게 사실만을 전달하려 노력했습니다. 기사가 나간 후 여러 독자들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일부 편지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기사 제목에 '바다 뛰어든 시위대 자진해산 / 경찰 방패에 맞아 2명 병원에 후송'이라고 돼있는데, 경찰 피해는 없었나요? 이처럼 편중된 기사의 내용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한바탕 싸움이 끝나고 나면 기자들은 더 바빠집니다. 부상자가 몇 명이고 중상자는 없으며 이들이 어디로 후송돼 갔는지, 또 연행된 사람은 없는지 등을 '팩트(사실관계)'로서 확인해야 하기 때문에 시위대와 경찰 지도부 관계자들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사를 송고하기 전에 다시 한번 변동 사항이 없는지 확인합니다. 그럼에도 간혹 부상자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해 위에서처럼 독자의 지적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첫날 충돌에서 다행히도 경찰 가운데 부상자는 없었습니다.)

경찰 잘못 지적하면 무조건 편파보도인가

협상 이틀째인 24일엔 시위대와 경찰이 더 크게 충돌했습니다. 여러 상황 중에는 분명하게 어느 한 쪽이 잘못했다고 단정을 내릴 수 있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경찰이 집회 참가자들에게 진정을 호소하고 질서유지 역할을 맡은 방송차량을 방패로 부수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이 차량에 타고 있던 사회자(전농 사무처장)는 그 전까지 계속해서 시위자들에게 폭력을 쓰지 말고 질서를 유지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도망가지도 못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차량을 막아 세우고 앞과 옆 유리를 방패로 깼습니다.

그리고 운전석에서 잔뜩 겁에 질려 웅크리고 있는 운전자에게 다시 방패와 곤봉으로 무차별 가격했습니다. 이후 차에 올라타 방송을 하던 사회자의 다리를 가격해 쓰러뜨린 후 10여 명의 전경들이 둘러싸고 집단 구타를 했습니다.

물론 돌발적으로 충돌이 격해지면 서로가 이성을 잃고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은 분명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시위대가 쇠파이프나 죽창을 들고 경찰을 내리치는 일도 없었고 맨몸으로 장시간 몸싸움이 벌어진 게 전부였습니다.

그런데도 경찰은 마치 시위대로부터 '대단한 폭력'이라도 당한 듯 작심을 하고 시위대를 공격했습니다. 더구나 방송차량 위에 올라가서 집회를 원만히 끌고 가려고 하는 사회자까지도 무차별 폭력을 가해 실신시켰습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이 상황은 현장을 포착한 사진과 함께 기사화됐습니다. 기사가 나간 후 또 다시 독자들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삼류 성인잡지의 내용과 동일한 기사를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무엇을 얻으려고 하시나요? 감각적인 기사가 무엇이 도움이 됩니까?"

심히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사실을 잘못 전달하고 있는 걸까? 중립에 서서 사물을 보자고 다짐하지만 나도 모르게 한쪽 편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되물었습니다.

가끔 현장은 우리가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잔혹할 때가 있습니다.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영상이 아닌 이상 취재기자들은 그 상황을 글로 풀어써야하는 만큼 정확한 상황 전달에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경우가 그랬습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기사는 그 상황의 참혹성을 100분의 1도 반영하지 못했는데, 되레 어떤 독자들은 "중립에 서라"며 나무랐습니다.



한국 경찰 우습게 봐서 폭력시위 발생한다고?

지난 9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3차 협상 때 원정시위대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옆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당시에는 이번처럼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하지도 않고 부상자가 속출하는 불상사도 없었습니다.

왜 이같은 일이 미국에선 일어나지 않는 걸까요. <중앙일보>는 25일자 사설에서 그 이유를 시위대가 미국 경찰은 무서워하고 한국 경찰은 우습게 보았기 때문이라고 적었습니다.

미국 경찰이 무섭다니요? 시애틀 시위 현장에서 만난 그곳 경찰은 시위대를 적대가 아닌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전거를 타고 시위대와 함께 하면서 오히려 시위대가 '안전'하게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시위대가 협상장 안으로 기습적으로 진입을 할 때도 방패나 곤봉은 없었습니다. 몸으로 그들을 막아 세울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요. 4차 협상이 열린 제주의 가을 하늘은 시애틀의 그것만큼이나 푸르고 높았지만 경찰들의 모습은 사뭇 달랐습니다.

시위대가 쇠파이프와 죽창을 들고 경찰을 향해 휘둘렀다면 그것이 비록 '막장에 도달해 어쩔 수 없이 나온 방어'라 할지라도 경찰의 강경 진압은 어느 정도 정당성을 지닐 수 있습니다. 허나 이번 시위대는 쇠파이프도, 각목도, 죽창도 없었습니다. 그저 맨손으로 협상장 앞에서 집회를 갖게 해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시애틀에서는 협상장이 있는 건물 바로 앞에서도 시위가 보장됐습니다. 사실 시위대가 협상장 앞에서 시위를 하는 이유는 그다지 특별하지 않습니다. 협상테이블에 몰래 잠입해 '깜짝 퍼포먼스'를 벌이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기들의 목소리를 협상단이 들을 수 있도록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를 내기 위한 것뿐입니다. 어쩌면 이런 목소리에 자극받은 우리 협상단이 좀 더 '애국'적으로 협상에 임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집회신고조차 안 받아주는 정부... 평화적 시위 기회라도 줬나?

a 협상이 막바지로 치닫던 지난 9월 8일 원정투쟁단이 보여준 삼보일배 행렬은 시종 질서정연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돼 시애틀 시민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 냈다.

협상이 막바지로 치닫던 지난 9월 8일 원정투쟁단이 보여준 삼보일배 행렬은 시종 질서정연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돼 시애틀 시민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 냈다. ⓒ 오마이뉴스 김연기

그럼에도 이곳에서는 집회를 여는 것은 물론이며 집회신고조차 안 받아주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헌법은 집회와 시위를 보장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결국 경찰은 평화적 시위를 운운하면서도 평화적 시위를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안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문화일보>는 25일자 사설에서 시위대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제주는 24일 하루만 해도 반대 시위대가 협상장에 진입하기 위해 투석전은 물론 경찰을 포위해 발로 차고 두들겨 패면서 부상자가 속출하는 유혈의 참극을 연출했다."

같은 날 <중앙일보> 사설은 또 이렇습니다.

"우려했던 대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장에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시위대가 경찰 방패와 헬멧, 곤봉을 뺏어 휘두르고 일부 경찰을 에워싸 발로 차고 두들겨 패기도 했다."

일주일간 고스란히 시위대의 현장을 따라다녔지만 이런 글을 볼 때면 사실 고개가 절로 갸우뚱해집니다. 있지도 않은 일이 사설을 통해 저렇게 '의견'을 빌어 '사실'로 둔갑하는 것을 보면 서두에서 지적한 공정보도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22일 제주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제주 전·의경 어머니회 분들이었습니다. 그 분들은 주룩주룩 쏟아지는 가을비를 맞으면서 하나같이 이번 시위가 평화적으로 이뤄지기를 기원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들의 바람과 달리 또 유혈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누구의 탓일까요?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시위대 가운데 10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던 25일 밤 쌀쌀한 날씨에 치뤄진 촛불문화제에서 한 농민은 절규하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기 화이바를 쓰고 애처롭게 서 있는 아이들을 보라. 모두 우리의 동생이고, 자식 같은 이들이다. 저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전부 이 정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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