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이렇게 망했다더이다"

[서평]중국 근대 소설가 양진인이 쓴 대한제국 멸망기...<조선망국연의>

등록 2006.10.27 12:04수정 2006.10.27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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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잃은 슬픔은 어떤 것인가?

a <조선망국연의> 표지

<조선망국연의> 표지 ⓒ 알마

나라를 잃은 슬픔이란 얼마나 큰 것이기에 목숨마저 끊게 하는 것일까? 나라를 잃을 것 같은 위기감과 두려움은 얼마나 큰 것이기에 중국인 저자는 이웃 조선의 멸망에 대해 이처럼 절절한 글을 써 제 동포들에게 알리려 한 것일까?


중국의 근대 작가인 양진인(楊塵因)이 쓴 <조선망국연의(朝鮮亡國演義)>를 접하면 자연스레 드는 생각이다.

일제에 의한 국권강탈 이후 10년 뒤인 1920년 중국에서 발행된 이 책은 딱딱한 역사의 기술이 아니라 <삼국연의(三國演義)>처럼 역사적 사실에 소설의 형식을 더한 일종의 팩션(Faction- 사실(Fact)과 허구(Fiction)를 합친 말)이다.

권율 장군의 후손이 나라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조선망국연의>는 동학운동,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 안중근 의사의 거사 등 당시의 주요 사건들을 실제 인물들을 통해 풀어가며 조선의 멸망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나라를 잃은 처지를 지은이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조선 사회는 가련하다 못해 참담할 지경이라고 해야 옳았다. 일본인들은 한마디로 장터 한복판에 느닷없이 뛰어든 맹수 떼였다. 그들이 저지르는 간음과 노략질은 하루에 10차례나 일어났다.


a 원서를 펼치면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마라'는 커다란 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저자인 양진인은 이 책을 쓴 목적을 도입부와 책 곳곳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원서를 펼치면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마라'는 커다란 문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저자인 양진인은 이 책을 쓴 목적을 도입부와 책 곳곳에서 소상히 밝히고 있다. ⓒ 심은식

그래도 어디 한 군데 그 원통함을 하소연할 곳이 없었고 비명 한 마디 지를 수 가 없었다. 그야말로 닭 한 마리 개 한 마리 평안할 날이 없었으니 진노하고 귀신마저 통곡할 지경이었다."


지은이는 조선이 이런 비참한 상황에 이르게 된 이유로 조선 왕실과 관료들의 무능함과 부패를 들고 있다.


서양 선교사들의 파견에 대한 대원군의 인식은 낯이 뜨거워질 만큼 어리석으며 이완용이 고종을 능멸하고 이토 히로부미에게 아첨하는 대목에서는 "글쓴이는 그들의 수작이 역겨워 차마 시시콜콜 다 쓰지 못하겠다"고 직접적으로 말 할 정도다.

옮긴이조차 번역을 하는 동안 수없이 모멸감을 느꼈다는 표현을 할 정도로 그의 비판은 강도가 높다.

어제의 역사가 아닌 오늘의 역사

본문은 단순히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식의 나열이 아니라 그동안 막연히 상상했던 당시의 상황들이 삽화와 함께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펼쳐진다. 다만 일반적인 역사 소설이 영웅적인 주인공을 등장시켜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에 반해 조선망국연의는 보다 객관적인 제 3자의 입장에서 조선의 멸망을 다루고 있다.

a <조선망국연의> 원서 표지.

<조선망국연의> 원서 표지. ⓒ 심은식

예를 들어 당시 일본의 조선침략에 대한 정치적 술수와 이에 대한 방비책으로 미국과 프랑스가 선교사를 파견해 조선인의 계몽을 유도하는 정책을 편다는 대목, 일본이 경제적 부채를 가지고 고종을 압박해 재정권을 빼앗는 대목 등 당시 동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을 바탕으로 냉정하게 풀어낸 이야기는 그간 피상적이거나 감정적으로 역사문제를 인식했던 우리에게 찬물을 쏟아 붓는 듯한 오싹함마저 느끼게 한다.

이는 <조선망국연의>가 과거의 상처와 치욕을 상기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해설을 단 전남대 이등연 교수의 지적처럼 이 소설이 '오래된 현재'이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드러나는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과 사리사욕에 눈먼 관리들에 대한 개탄스런 현실이 어제가 아닌 오늘의 역사, 바로 지금의 상황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완용에 대한 묘사 일부를 살펴보자.

"이완용은 이토의 밀약이 담긴 서찰을 마치 옥황상제의 칙서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들었다. (중략) 마치 아편에 중독된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일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중략) 조국과 백성들, 케케묵은 과거 조상들의 명예, 장차 태어날 자손들의 운명 따위를 염두에 둘 턱이 없다."

고종은 또 어떠한가?

a 조선망국연의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끝으로 글을 마친다. 글의 말미에 지은이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거울삼아 돌이켜보자'는 말을 한다. 대한민국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조선망국연의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끝으로 글을 마친다. 글의 말미에 지은이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거울삼아 돌이켜보자'는 말을 한다. 대한민국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 심은식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모르는 고종 황제는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파 매국노들의 농간에 놀아나 오히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으로 부임하러 오는 것을 반겼다.(중략)

그는 통감부 설치를 거절하기는커녕 도리어 통감이 하루 속히 부임하여 자신이 떠안고 있던 그 숱한 골칫거리를 모두 덜어주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소설이다 보니 사실 관계에 있어 왜곡이나 과장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대목들을 지은이의 조선에 대한 단순한 비하로 읽을지 아니면 반성해야 할 쓰디쓴 약으로 받아들일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부분이다.

비록 <조선망국연의>는 작가가 조선의 멸망을 거울삼아 자신의 동포인 중국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쓴 글이지만 여전히 그 목소리는 크고 아프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10월 26일로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있은 지 꼭 97년이 되는 해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고 했던가? 날이 몹시 차다. 몹시.

조선망국연의 - 전2권 - 소설 - 조선은 이렇게 망했다

양진인 지음, 임홍빈 옮김,
알마,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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