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59회

등록 2006.10.27 08:16수정 2006.10.27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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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천벌을 받았는지도 몰랐다.

"어찌 할까요?"


곽정흠은 속으로 욕을 퍼붓다가 수하의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볼 건 다 본 셈이었다. 분명 야간에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자신이 조사하고 보고를 해야 당연했지만 이미 철담 어른의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보주가 함곡선생과 풍철한을 불러들인 사실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섣불리 자신이 조사하기도 애매했다.

'흉수는 분명 침상 밑에 숨어 있다가 한창 정신없는 순간에 두 사람을 찌른 것인데….'

사건현장은 너무나 단순해서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그만이었다. 죽은 시각을 추정한다든가, 흉수가 언제 어떻게 침상 밑으로 들어온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빠져나갔는지, 주위에 이곳 주위를 얼쩡거렸던 인물을 본 목격자가 있는지 등은 전문가가 해야 할 일이었다.

'어떻게 한다…? 좌총관께 알려야 하나…. 그냥 귀산(鬼算) 노인에게 알리기만 하면 되나…?'

그는 잠시 망설였다. 언제나 그렇듯 인원에 변동이 생기면 귀산노인에게 알리면 그만이었다. 살해당해 죽은 것도 인원의 변동이니 당연히 알기는 해야 했다. 허나 이들의 죽음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곽정흠은 좌등에게도 보고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귀산 노인에게 가는 것은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수하를 보고 말했다.


"강충(姜翀). 자네는 이곳에 남아 있도록 하게. 단, 어떤 사람도 내 허락 없이는 출입을 시켜서는 안 돼. 자네 역시 이곳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손대거나 옮겨서도 안 되네. 이 안에서 그저 보기만 하게. 재미있지 않은가?"

남녀가 교합해 있는 자세로 죽어 있는 것을 빈정거린 말이었다. 그는 말과 함께 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별로 재미있지 않습니다."

무뚝뚝하고 앞뒤가 꽉 막힌 수하였다. 하기야 벌거벗었다 하지만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신이다. 문을 막 나서던 곽정흠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아…, 한 가지 더… 누군가가 이곳에 얼쩡거리거나 들어오려 한다면 반드시 그자가 누군지 파악해 두게. 이건 매우 중요한 일이네."

"알겠습니다."

강충의 대답을 들으며 그는 그 전각을 벗어났다. 곽정흠 역시 어디선가 들었던 풍월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었다. 흉수는 반드시 현장에 들른다는 말을….


38

풍철한은 반효가 자신의 몸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어나기 싫었다. 어젯밤 잠이 쉽게 들지 않아 한참이나 뒤척이다가 뒤늦게 잠이 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기억할 수는 없지만 밤새도록 누군가에게 쫓기는 꿈을 꾼 것 같았다.

"피…곤해…, 내버려 둬…."

그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반효의 손이 귀찮다는 듯 벽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만 일어나시오. 밖에 사람이 기다리고 있단 말이오."

"누구…?"

풍철한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귀찮다는 듯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나왔다.

"좌등선배 말이오."

"벌써 날이 밝은 거야?"

"해가 뜰 시각이오."

풍철한이 본래대로 돌아누웠다.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꼭두새벽에 도대체 뭐 급한 일이 있다고 온 거야? 나중에 해도 되잖아. 아예 죽도록 부려 먹으려고 작정을 한 거야?"

욕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하기야 문 앞에 좌등이 와 있다고 하니 더 심한 말은 하기 어려웠다.

"간밤에 일이 터진 모양이오."

"뭐…? 또 뭔 일이…?"

풍철한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상체를 일으켰다. 몸은 피곤해 죽겠지만 이미 잠이 깬 상태였다. 반효와 실랑이를 더 벌인다고 해도 어차피 다시 잠들기는 틀린 노릇이었다.

"쇄금도 윤석진이 살해당했소."

이미 방문은 열려 있었고 좌승은 반쯤 몸을 디민 상태였다. 좌등의 얼굴은 아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풍철한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직 여운이 남아있는 잠이 확 달아나버렸다. 갑자기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윤석진은 철담 어른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었다. 철담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본 최초의 목격자. 어제 만나 잠시 물어보기는 했어도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다. 더구나 사건 현장을 최초에 본 자로 그 후 달라진 것이 있는지 조사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있었다.

더구나 어젯밤 잠들기 전 함곡이 찾아가보려 했던 자 아닌가? 너무 늦은 시각이어서 말리기는 했지만 자신의 직감으로도 뭔가 결정적인 단서를 줄 수 있는 자라고 생각했다. 그런 자가 죽임을 당했다니…. 이것은 문제였다. 그는 황급히 겉옷을 걸치며 벌떡 일어섰다.

'흉수가 우리들의 거동까지 빠짐없이 보고 있다는 결론인가? 우리의 대화까지 모두 듣고 있는 것일까? 결국 윤석진이 실마리였던가? 큰 실수를 했군.'

윤석진이 죽었다면 흉수가 그의 입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뇌리에 스쳤다. 차라리 무례하다고 욕을 먹을지언정 어젯밤 함곡의 말대로 찾아가 볼 것을 하는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가 방문을 나서자 함곡과 그의 여동생 선화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 단정하게 의복을 걸치고 머리까지 단정하게 묶은 것을 보니 좌등이 오기 전에 일어나 있었던 것 같았다. 풍철한은 아직 제대로 의복을 갖추지 못한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황급히 옷깃을 여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함곡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은 말을 하지 않아도 함곡에게 많은 것을 묻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자네가 예상했던 차후에 일어날 사건이 쇄금도였나?"

함곡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배제하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생각했네. 나 역시 지금 매우 당혹스럽네."

함곡 역시 풍철한과 같이 뒤통수를 둔기로 맞은 듯한 아주 더러운 기분이었다.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다음 대상이 쇄금도가 될지는 그 역시 확신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만일 쇄금도가 대상이라고 생각했다면 풍철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젯밤 늦게라도 그를 찾아갔을 것이다.

"목표가 철담 어른이었던가?"

풍철한은 옷깃의 마지막 매듭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흉수가 노리는 최종 목표가 운중보의 보주나 다른 사람이 아닌 철담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갑자기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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