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60회

등록 2006.10.30 08:13수정 2006.10.30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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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단하지 말게. 쇄금도의 죽음은 여러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네."

사실 여러 가지 가정을 할 수 있지만 철담이 죽고 그 시신을 맨 처음 목격한 그의 제자가 살해당했다는 사실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가정은 크게 세 가지였다.


하나는 철담과 원한이 깊어 그를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그와 연관된 인물들을 죽이는 것이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배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철담의 죽음에 대해 최초의 목격자이자 제자인 그가 무언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막으려 죽였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는 스스로 사부의 죽음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었고 뭔가 단서를 쥐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함곡과 풍철한에게 넌지시 비친 바 있었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추론이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한 번쯤 윤석진이 보 내에서 닷새 동안 무엇을 했는지 행적을 조사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조사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면 운중보주나 아니면 자신과 가까운 누군가에게 그 단서를 말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사실을 안 흉수로서는 여간 켕기는 존재가 아니었을 것이다. 또한 윤석진이 철담의 사건을 조사하게 된 함곡과 풍철한을 만났다는 점도 흉수로서는 위협적으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어제 윤석진의 태도로 보면 철담의 죽음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것이 분명했다. 운중보주에게 무소불위의 권한을 받은 함곡과 풍철한 일행에 윤석진이 합류하게 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는 의미다.

- 운중보 내의 일은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셔야 일이 빨라질 거요. -

무슨 의미였을까? 그가 조언이라고 남긴 마지막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사건의 조사에 있어 최초의 목격자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만약 그가 최초로 목격했던 장소에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있었고, 윤석진이 그것을 파악하고 있었다면 흉수로서는 반드시 윤석진을 죽이고자 했을 것이다.


나머지 한 가지는 철담의 죽음에 제자인 그가 관련되어 있었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만약 윤석진이 흉수와 짜고 사부인 철담을 죽인 것이라면 흉수가 철저하게 사건을 은폐시키기 위해 공범인 그를 살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정이었다. 물론 이 세 번째 가정도 가능성은 낮지만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 분명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함곡은 좌등을 보고 물었다.


“닷새 전 쇄금도가 이곳에 도착해 철담 어른의 거처로 간 시각은 신시 말이라고 했소. 혹시 쇄금도가 철담 어른의 거처로 가기 전에 만난 사람이 있었소?”

좌등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까지는 알 수 없소. 사실 최근에는 워낙 손님들이 많이 들어오는 관계로 한 문파의 문주라 해도 일일이 챙기지 못하는 실정이오.”

능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함곡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좌대협께서 도와 주셔야 하겠소. 쇄금도는 배에서 하선한 후 철담 어른의 거처로 갔다가 그곳에 성곤어른이 계신다는 가려란 여인의 말을 전해 듣고 자신의 거처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고 했소. 혹시 쇄금도가 자신의 거처든 아니면 어디를 갔던 누구를 만난 적이 있는지 조사해 주실 수 있겠소?”

좌등 자신도 이미 윤석진에게 들은 적이 있는 말이었다. 이미 은근하게 알아본 바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거처를 떠나지 않았다. 윤석진이 반 시진 동안 자신의 거처에서 무엇을 했는지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 사실까지 말할 이유는 없었다. 아마 윤석진이 죽어있는 모습을 보면 함곡 같은 인물은 대번에 상황을 알아차릴 터였다.

“알겠소. 오늘 내로 조사해 말씀드리겠소.”

말이야 부탁이지만 거절할 수 없는 명령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차피 용봉쌍비를 들고 있는 것도 그렇지만 자신이 하늘로 알고 있는 보주가 분명 명하지 않았던가? 좌등의 대답에 함곡은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그것은 도와주는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고, 예의였다. 풍철한이 불쑥 나섰다.

“자... 쇄금도의 시신이 있는 곳이 어디요? 가 봅시다.”

성질 급한 풍철한이 먼저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좌등이 따라 나가며 힐끗 고개를 돌려 함곡을 보았다.

“쇄금도의 시신은 매송헌(梅松軒) 근처의 소각에 있지만 풍대협과 함곡선생이 먼저 가실 곳은 그곳이 아니오.”

풍철한이 걸음을 멈추고 뒤따라오는 좌등을 바라보았다. 짜증난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윤석진이 죽었다는 것 때문에 일찍 깨워 놓고는 정작 가봐야 할 곳이 거기가 아니라니... 누구를 놀리는 것인가? 그럴 거면 왜 이리 일찍 깨웠단 말인가? 풍철한의 표정으로 이미 그의 마음을 읽은 좌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불만은 있었지만 딱히 뭐라 하기도 어렵다.

“사건이 또 하나 발생했소. 간밤에 신태감이 살해당했소.”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움직임을 멈췄다. 한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건 무슨 황당한 이야기인가?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사실 사람의 죽음에 있어 정도를 따지는 것은 이상했지만 쇄금도 윤석진의 죽음과 신태감의 죽음은 그 충격과 심각성에 있어 아예 비교가 되지 않았다.

좌등의 얼굴이 왜 그리 심각하게 굳어있었는지 이제야 알만했다. 왜 이 꼭두새벽부터 서둘러 자신들을 깨웠는지 절로 고개가 끄떡여졌다. 이건 정말 큰일이었다. 무림인도 아닌 조정에 몸담고 있는 고위 관료가 살해당한 것이다.

더구나 황제보다 더 큰 위세를 부리고 있는 위충현의 측근이 죽은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사건은 철담의 죽음보다도 더욱 심각하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운중보의 존폐와도 직결되는 문제일 수 있었다. 이제 운중보 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떠한 광풍이 이 운중보를 휩쓸고 지나갈지 상상할 수 없었다.

철담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들어 온 풍철한과 함곡은 정말 난감했다. 난감한 정도가 아니라 앞이 캄캄했다. 신태감을 죽인 흉수를 밝혀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이 운중보 내에 있는 인물들 모두 마찬가지다.

“빌어먹을… 이거 완전 돌겠군.”

풍철한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아마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 역시 그보다 더 심한 말을 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굳어있던 사람들은 풍철한의 욕설로 인하여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함곡과 풍철한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켜들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완벽하게 올가미에 걸린 짐승의 원망스럽고도 도살당할 날을 기다리는 눈빛을 연상케 했다. 함곡이 씁쓸한 고소를 머금었다.

“가보세.”

그의 어조는 낮았고, 힘이 없었다. 함곡의 말에 몸을 돌린 풍철한이 갑자기 반효를 보고 소리쳤다.

“헌데 이 자식은 어디에 있어…? 아직도 자빠져 자고 있는 거야? 깨워. 아무래도 오늘부터는 이 자식도 데리고 다녀야겠어.”

설중행을 가리킨 말이었다. 반효가 대답하기 전에 좌등이 먼저 대답했다.

“풍대협이 데리고 들어 온 설중행이란 청년이라면 오다보니 저쪽 난간에 있는 것 같았소. 몸을 푸는 것 같았는데 몸이 상당히 유연했소.”

사람마다 약간은 다르지만 새벽에 운기하거나 굳은 몸을 푸는 것은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 습관이었다. 습관이란 것은 무서워서 한번 길들여 놓으면 건너뛰기 힘들었다. 왠지 몸이 찌뿌듯하고 측간에 갔다 밑 안 닦은 느낌을 하루 종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지런도 하군… 야… 이리와!”

풍철한이 문을 나서며 소리치고 있었다. 따라 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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