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의 정계개편 '틈새전략'

[김종배의 뉴스가이드] 상대의 위기를 기회로 활용

등록 2006.11.03 09:01수정 2006.11.3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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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건 전 총리

고건 전 총리 ⓒ 오마이뉴스 심규상

생각보다 강수를 뒀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아쉬우면 찾아오라고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건 전 총리가 한 말이다.

고건 전 총리는 정기국회가 끝나는 12월부터 신당 창당을 본격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국민대통합을 이루겠다면서도 기존 정당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통합을 하더라도 자신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통합 가이드라인도 제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북핵 사태로 어려운 안보 위기 속에 국정에 전념해야 한다"며 "노무현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을 지키겠다고 공언했다"고 강조했다. 친노세력을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어조는 강하고 입장은 단호하다. '마이 웨이'를 선언한 것 같다. '긴' 고민 끝에 '명쾌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하지만 아니다.

신당창당 선언에 숨은 틈새전략

고건 전 총리의 입장엔 전략이 숨어있다. 틈새전략이다. 상대의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는 전략이다.

고건 전 총리의 신당 구상엔 두 개념이 혼재돼 있다. 독자신당과 통합신당이다. 기존 정당에 들어가지 않고 신당을 창당하겠다는 것은 독자신당의 길을 가겠다는 얘기다. '적절한 시점'에 '국민통합신당 추진 원탁회의'를 만들겠다는 얘기는 통합신당을 모색하겠다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두 개념이 혼재돼 있는 게 아니다. 단계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우선 독자신당을 추진하고 다음 단계에 통합신당을 추진하겠다는 뜻이다.

이런 사정이 있다. 고건 전 총리가 범여권 대선후보 입지를 탄탄히 하기 위해선 조직기반을 최대한 확대해야 하고 이를 통해 대세를 굳혀야 한다. 그러려면 국회의원들을 모아야 한다. 기존 세력에 '안길' 게 아니라 그들을 '안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틀이 필요하다. 그 대안이 독자신당이다.


틈새가 있다.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대법원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 확정 판결을 앞두고 있다. 대법원 판결이 나는 순간 한화갑 대표는 의원직은 물론 대표직도 내놔야 한다. 그러면 민주당 내 역학구도가 흐트러지면서 분열 요소가 커지게 된다.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소출은 크다. 호남의 맹주를 자처할 수 있다. 범여권 대선후보 입지를 다지는 데 이것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다.

그래도 2%가 부족하다.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없다는 문제가 남아있다. 노출도를 높여서 지지도를 끌어올리려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해야 한다. 원내섭단체 깃발을 들고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 정세를 조율해야 한다. 부수적이긴 하지만, 그래야 실탄, 즉 정치자금도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다.

열린우리당 의원 일부를 끌어들여야 한다. 많을 필요도 없다. 몇 사람이면 된다. 한번 해볼 만한 일이다.

고건 전 총리가 왜 '지금'이 아니라 '12월부터' 신당 창당작업을 본격화하겠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살필 수 있는 대목이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내년 예산안이 정기국회에서 처리되는 12월 중순 이후 정계개편 논의를 본격화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고, 어제 열린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서도 정계개편에 대한 결론을 정기국회 이후로 미루기로 했다.

고건 통합 변수는 '민주당'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원내교섭단체가 꼭 정당의 형태를 갖출 필요는 없다. '연합' 형태로도 얼마든지 구성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고건 전 총리가 모색하는 독자신당이 당의 형태를 의미한다고 읽을 필요는 없다. 요체는 당의 형태가 아니라 '자기 세력'이다. 당의 형태를 띠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

상황을 이렇게 풀어가야 2단계 통합을 느긋하게 맞이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 통합파는 누가 뭐래도 다수 의석을 가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다. 이들과 짝짓기를 하는 과정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조금 더 욕심을 내서 초장에 기를 누르려면 혼수품을 넉넉히 준비해야 한다. 한 번 책을 잡히면 평생을 가는 법이다.

고건 전 총리의 '수'는 대충 읽었으니 이제 계가를 해보자. 잘 될까?

변수는 민주당이다. 민주당 내 주류와 비주류 세력이 입장을 달리 하고 그 때문에 고건 전 총리가 절반의 세력만 안게 된다면 상황이 꼬인다. 고건 전 총리가 '친노세력 불가'를 천명한 이유가 바로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다시 말해 민주당을 통째로 안기 위해 속살을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결과는 미지수다.

만에 하나 민주당 전부를 안지 못하면 정계개편 '본선' 전에 빼내야 할 열린우리당 의원 숫자를 늘려야 한다.

하지만 '몇몇'이 아니라 '여럿'이 움직일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몇몇'은 취향과 개성의 결과일 수 있지만 '여럿'은 세의 지배를 받는다.

고건 전 총리의 지지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본인은 정치에 뛰어들기로 작정한 만큼 지지율이 곧 회복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지만 두고 볼 일이다. 두고 보려면 시간을 끌어야 한다. 굳이 과속할 이유가 없다.

고건 전 총리의 지구력도 의심스럽다. 1년 가까이 좌고우면하다가 이제야 겨우 입장을 세운 사람이다. 대선 지형 변화에 따라 그가 또 다시 어떤 선택을 할지 알 길이 없다. 무턱대고 그에게 줄을 서자니 께름칙하다. 대선도 대선이지만 대선 넉달 뒤 치러질 총선에서 고건 전 총리가 뒷배를 봐준다는 보장이 없다.

움직여도 같이 움직이는 게 안전하다. 자칫 '열외' 취급받는 신세로 전락하느니 안전하게 여러 사람이 서는 줄에 끼는 게 낫다.

그래서 불투명하다. '최종'은 고사하고 1단계 전략이 주효할 것인지도 장담할 수 없다. 이런 마당에 2단계, 더 나아가 대선 결과를 예측하는 건 무모할 뿐더러 부질없다. 한 가지 점만 환기하는 것으로 갈음하자.

친노세력을 극소수로 만들라

a 열린우리당은 2일 오전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고 공개적인 여권 정계개편 논의를 시작했다.

열린우리당은 2일 오전 국회에서 의원총회를 열고 공개적인 여권 정계개편 논의를 시작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열린우리당은 어제 의원총회를 열어 정계개편 논의를 유보하기로 했다. 일단 정기국회부터 끝내놓고 보자고 했다.

열린우리당 내 계파 싸움이 격렬해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한 게 아니다. 아직 싸울 때가 아니기 때문에 몸 풀 시간을 더 갖기로 한 것이다.

통합파 입장에선 친노세력 중심의 사수파가 어떻게 나올지 예단할 수 없다. '히든 카드'를 갖고 있는지, 세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뿐만이 아니다.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할지도 아직 오리무중이다.

친노세력을 마냥 내칠 수도 없다. 그랬다가 행여 친노세력의 규모가 꽤 큰 것으로 나타나면 통합 명분은 분열주의 비난에 포위당하고, 대선 승리는 물 건너간다. 어떻게든 친노세력을 '일부 극소수'로 만들어야 한다.

이래저래 통합파에겐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은 집안 단속 할 때이지 곁눈질할 때가 아니다. 자칫하다간 일이 이상하게 꼬일 수 있다. 1년여 동안 '조심 운전'하다가 큰 맘 먹고 가속 페달을 밟았는데 그 결과가 '난폭 운전'으로 나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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