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65회

등록 2006.11.06 08:06수정 2006.11.06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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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질문은 운중보에 몸담고 있는 좌등에게 매우 곤란한 질문이었다. 그는 그 질문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자신의 지위를 고집하고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 적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사실 그가 의견을 제시한다면 운중보주마저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이 있었다.

그런 그가 개인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었다. 헌데 그의 곤란함을 벗어나게 해 준 것은 마침 모습을 보인 홍교와 당화 두 명의 시비들이었다.


"악…!"

그녀들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욕조에 든 신태감의 흉측한 몰골에 비명을 질렀다. 저런 참혹한 광경은 그녀들에게 난생처음 보는 광경일 것이다. 그녀들은 황급히 자신의 손으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를 막았지만 매우 겁먹은 표정이었고, 금시라도 눈물이 방울져 떨어질 것 같이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허나 좌등은 그녀들을 배려할 여지없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부터 이 두 분이 묻는 말에 추호도 거짓이 없이 대답하거라. 만일 나중에라도 거짓이 밝혀지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알… 알겠사옵니다… 총관 어르신…."

두려움에 가득 찬 표정을 지어도 묘한 색기가 감도는 당화가 연방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대답 없이 고개를 끄떡이는 홍교는 오히려 체념한 듯한 표정도 섞였다. 다른 시비보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소임을 다한 것뿐인데 재수 없게 사사건건 그녀가 연관이 되고 있었다.


"홍교라 했느냐?"

함곡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떼었다.


"예… 나으리…."

시비로서는 윗사람이나 손님들에게 이름이 기억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허나 지금의 처지에서는 오히려 기억되지 않았으면 싶었다.

"왜 욕조를 이 방으로 가져왔으며, 물은 얼마나 채웠는지 소상하게 말해 보거라."

"저쪽 나으리께서 물을 준비하라 하셨사옵니다. 들어오시던 태감 어른이 몸이 불편하신 듯하여 목욕을 하시려는 게 아닌가 생각했사옵니다. 물을 데우고 욕조를 방 안에 가져다 놓고는 물을 채웠사옵니다. 태감 어른께서 주무시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절반 정도만 채웠사옵니다. 혹여 나중에 깨셔서 목욕을 하시면 그 때…."

사실 사내는 목욕을 자주 하지 않는다. 얼굴도 물로 직접 씻어내는 것이 아닌 천에 물을 묻혀 대충 닦아내는 정도. 하지만 목욕을 그런대로 자주 하는 여인네라면 목욕을 할 때 한꺼번에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지 않는다. 목욕을 하면서 뜨거운 물을 조금씩 욕조에 넣어야 물이 식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너희들은 물을 채우고는 이 방에서 나갔다는 말이구나. 당연히 너희들은 저 방에서 대기하고 있었겠구나."

이 방은 이중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두 개의 방이 겹쳐져 있는 형태로 안쪽의 방은 창문이 아니라면 반드시 바깥쪽의 작은 방을 지나야 들어올 수 있었다. 대개 소란함을 방지하거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한 구조로 아랫사람들은 대기할 때 보통 바깥방에 있게 마련이었다.

함곡의 질문에 홍교는 대답을 머뭇거렸다. 두려움에 금방 울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런대로 조리 있게 대답했는데 입을 열면 울음이라도 터질 것 같아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당화란 시비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둘이 같이 있다가 홍교언니가 피곤해하는 것 같아 먼저 가서 쉬라고 했사옵니다. 매향(梅香)이란 년은 놀고…, 아니… 홍교언니 혼자서만 너무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 같아서…."

아마 매향이란 이름을 가진 시비는 배식거리며 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른들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오는 것을 꿀꺽 삼키고는 말끝을 흐렸다.

"그래…, 피곤하기도 했겠지."

함곡은 고개를 끄떡였다. 본래 부지런한데다 서교민이란 놈에게 봉변까지 당하고, 그놈이 죽는 바람에 조사까지 받았으니 확실히 피곤했을 것이다.

"언제 돌아갔느냐?"

"물을 채우고 일각정도 있다가…, 나직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에 주무시는 것으로 알았사옵니다. 안에 기척이 있으면 부르라고 하고는…."

먼저 들어가 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홍교는 힐끔 좌등을 보고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럼 그 이후에는 너 혼자 있었겠구나. 언제까지 대기했느냐?"

"그… 그것이…."

당화가 함곡의 질문을 받자 잠시 주춤거렸다.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당황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있었냐니까…?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느냐?"

다시 함곡이 재촉을 하자 당화는 갑자기 풀썩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잘… 잘못했사옵니다…, 흑… 소비도 모르는 가운데 잠이 들어 깨보니 새벽이었사옵니다. 흐흑…."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신태감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자라면 시비 하나쯤 수혈 짚는 거야 눈 한 번 깜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 좌등이 함곡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이제 더는 물어볼 것이 없느냐는 의미다. 함곡 역시 더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떡였다.

"되었다. 너희들은 어서 나가 보거라. 차후에는 일에 소홀히 하는 법이 없도록 하고…."

"감사하옵니다."
"명심하겠사옵니다."

큰 곤경에 처할 것 같았는데 웬일인지 좌등이 쉽게 용서를 하자 당화는 눈물을 그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수없이 고개를 숙이면서 홍교와 뒷걸음을 쳐 방을 나갔다.

단서는 없었다. 하기야 시비들 정도에게서 나올 정도의 단서를 흘린 흉수라면 신태감같은 인물을 죽일 수 없었을 터였다. 사인은 분명했고, 그 무공도 파악했다. 단서나 정황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신태감을 살해한 동기와 옥음지와 염화신공을 익힌 자가 누구이냐는 것이었다. 하나같이 중원을 뒤흔들만한 절세비공이어서 이를 익힌 자는 절대 두세 명을 넘지 않을 터였다. 아마 살아있다면 옥룡이나 화룡을 찾는 것이 더 빠른 길일지도 몰랐다. 분명 그들로부터 전수받았을 테니 말이다.

"연관이 있을까?"

풍철한이 불쑥 함곡을 보며 물었다. 신태감이 살해당한 것이 철담의 죽음과 관련이 있느냐 하는 말이었다. 함곡은 고개를 끄떡였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네. 다만 느낌으로는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물론 후계 다툼의 희생양이라는 생각도 배제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함곡은 말끝을 흐렸다. 표면에 나타난 것은 분명 후계 문제로 인한 갈등이다. 하지만 운중보에 흐르는 이상기류는 반드시 후계 문제만은 아니었다. 구룡의 무학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 후계 문제만은 아니라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나 역시 자꾸 후계문제는 도화선일 뿐이란 생각이 드는군."

"복잡하게 얽히고 있는 것이네. 여러 가지 문제가 얽히다 보니 어느 것이 실마리인지 찾기 어렵군. 그렇다고 무조건 후계문제를 피상적인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문제가 있네."

"왜?"

"아까 보지 못했나? 보주의 다섯 번째 제자 말일세. 그가 조정 현 권력자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추산관(萩?寬) 태감의 아들이라네. 신태감은 추태감의 손발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측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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