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64회

등록 2006.11.03 08:11수정 2006.11.03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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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귀산노인에 대해서는 들은 바 있었다. 성격이 괴팍하고 운중보주 앞에서 쓴소리도 잘하고 산학(算學)에 뛰어나 운중보의 모든 살림살이를 관장한다는 노인. 좌등이 즉답을 피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귀산노인이 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줄지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잠시 풍철한이 생각에 빠지자 함곡이 불쑥 좌등에게 말을 건넸다.


"이번 회갑연을 끝으로 보주께서 후계자를 정하고 물러나신 후 중원 이곳저곳에 다니시겠다고 하신 것 같은데……."

"넌지시 그런 말씀을 비추신 적이 있소. 내가 필히 모시겠다고 하였소."

운중보주에게는 좌등만 한 충복도 없을 것이다.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면서 보주가 신경을 쓰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는 인물이 그였다.

"헌데 내정된 후계자는 다섯 제자 분들 중 누구요?"

함곡답지 않은 질문이었다. 함곡 정도라면 벌써 운중보의 후계자가 누가 될지 이미 꿰뚫고 있을 능력의 소유자가 아닌가? 좌등은 이런 질문을 하는 함곡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자, 잠시 함곡의 얼굴을 주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걸 내 어찌 알겠소?"

"짐작 가는 바도 없소?"


"보주의 다섯 제자들은 각기 다른 능력과 인품을 가지고 있소. 하나같이 뛰어나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오. 다섯 제자 중 누가 보주의 뒤를 잇더라도 뜻밖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면 다섯 제자들은 필시 자신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고 있겠구려?"

이제야 좌등은 함곡이 무슨 의도로 장황하게 서두를 꺼냈는지 알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 그것이 이번 후계자를 정하는 데 있어 보이지 않는 암투의 결과가 아니냐는 의미가 짙었다.

"당연한 일 아니겠소? 중원 무림 각 문파에서 왜 대를 이을 아이들을 본 보에 보내겠소? 그들의 목적은 단 하나요. 보주의 눈에 들어 보주의 후계자가 되는 것. 다섯 제자들은 그 어려운 경쟁을 뚫고 보주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만인의 부러움을 받을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과 그들을 위해 뒤를 받쳐주는 가문이나 문파들은 가만히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오?"

말을 아끼는 좌등이지만 함곡과 풍철한에게 호의를 느낀 좌등은 오랜만에 자신의 가슴 속에 있는 말을 꺼냈다. 한편으로는 과연 현 운중보주가 아닌 제자 중 한 명이 후계자로 선택된다고 해서 전과 같이 운중보를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좌선배께서는 이번에 보주께서 은퇴하시고 후계자를 정하는 것이 별로 탐탁지 않게 생각하시는 모양이오?"

"아니라고 부인하지 않겠소. 지금 본보에 들어오지 못해 안달 난 사람이나 문파들이 많소. 만약 미리 보주께서 인원을 한정하지 않았다면 본보는 서 있기 조차 불편할 정도로 사람들이 들끓게 되었을 거요."

"그 정도로 심하오?"

"본보의 엄한 규율이 없었다면 지금쯤 본보는 피로 얼룩졌을 것이오."

"제자들 간에는 그리 사이가 나빠 보이지 않던데…."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그렇소. 더구나 보주께서는 사형제 간의 우의를 매우 중시하는 분이오. 만약 사형제 간에 알력이나 반목이 있는 인물이라면 후계를 잇지 못하리란 생각은 다섯 제자 모두 알고 있는 상황이오. 그러니 속내야 다를지 모르지만 누가 겉으로 티를 내겠소?"

아마 운중보주는 나중을 염려했을 것이다. 후계를 잇는 제자 혼자로는 운중보를 이끌어 나가기 힘들다. 자신 역시 동정오우란 친구들로 인하여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친구들이 있음으로 해서 운중보주는 더는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않고 중원 위에 우뚝 설 수 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후계자와 나머지 제자들이 반목이 생겨 서로 칼을 들이대는 상황까지 간다면 비극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그런 상황이 온다면 이미 운중보 내의 일이 아니라 이 중원 전체가 패로 갈리어 끔찍한 참극이 일어날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제자들의 배경이오. 천신만고 끝에 오른 자리에서 이제 중원을 한 손에 거머쥐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할 마지막 순간이오. 그들의 가문과 문파는 오히려 눈치를 보느라 그래도 좀 낫소."

좀처럼 말이 없던 사람이 말문을 열자 시원스럽게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함곡과 풍철한은 연신 고개를 끄떡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럴 때는 그저 장단만 맞춰주는 것으로 족하다. 공연히 말을 잘못했다가는 좌등이 입을 다물어 버릴 터였다.

"우습지도 않게 동향이네, 사돈이네…. 하다못해 조금만 연줄이 있어도 달라붙는 실정이오. 결정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노골적으로 변하고 있소. 미리 줄을 서야 나중이라도 그 덕을 볼 수 있을 것이란 얕은 생각들이 아니겠소?"

"그들만 탓할 것도 아니오. 세상인심이란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소?"

"그러니 말이오. 하지만 벌써부터 패거리를 짓는 것이 아주 위험해 보여서 하는 말이외다. 육파일방은 물론 내노라 하는 문파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안팎에서 인면수심의 짓거리도 서슴지 않으니 말이오."

"육파일방은 누구를 밀고 있소?"

풍철한은 질문을 하다말고 아차 싶었다. 이런 때에 이런 질문은 상대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법인데…. 아니나 다를까? 좌등은 한순간 자신이 다소 흥분했음을 깨달았다. 왠지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다 보니 허심탄회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굳이 할 말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단숨에 말을 끊을 수 없어 있는 상황만 요약해 대답했다.

"그들 역시 생각이 제각각이오. 소림과 무당, 그리고 점창(點蒼)과 아미파의 인물들은 이미 본보에 들어와 있고, 오늘 중으로 화산파(華山波)의 장문인인 자하진인(紫霞眞人)께서 당도할 것 같소. 곤륜(崑崙)에서는 예물만 보내왔을 뿐이오. 이상하게도 개방에서는 전혀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소. 잔치 날 몰려드는 게 거지들인데 웬일인지 모르겠소."

"자하진인까지…? 본래부터 밖으로 나서는 것을 꺼리는 노인네가 노구(老軀)를 이끌고 운중보까지 온다…? 정말 신기한 일이군."

풍철한이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부침이 심한 가운데 육파일방 중 유일하게 피해를 적게 입은 곳이 화산이었다. 장문인인 자하진인은 구룡이 중원에 모습을 나타낼 당시 아예 화산의 문을 걸어 잠그다시피 해 놓고는 후진양성에 전력을 기울인 인물이었다.

자하진인은 구룡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그때부터 그들의 무서움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이미 썩어 빠질 대로 썩어빠진 구파일방이 구룡과 맞서는 일은 이란격석(以卵擊石)의 형세임을 깨닫고 있었다. 공표는 하지 않았지만 화산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들은 무림의 일에 나서지 않았다. 제자들도 중원에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구룡의 시대가 동정오우에 의해 끝난 뒤에도 역시 화산은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십여 년 전부터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중원의 무림인들은 그제야 화산이 그 전의 화산이 아님을 깨달았다. 검에 매달린 매화(梅花)를 닮은 수실은 단 하나만 달렸어도 무시할 수 없는 절정검수였다.

또 그들의 태도는 경직되었다고 생각할 만큼 엄격하고 절도가 있었다. 그들의 행동은 정당했고 과거의 위엄을 간직하고 있었다. 십년의 세월 속에서 무림인들은 이제 육파일방을 이끌어가는 곳이 소림과 무당이 아니라 화산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잠룡검(潛龍劍)의 부친인 만권문의 문주 철권(鐵拳) 장혁(蔣爀)이 자하진인을 지난 오년 동안 열세 번을 찾아갔다고 들었네."

고집스럽고 성격이 불 같은 철권 장혁이 열세 번을 찾아갈 정도라면 그의 자존심 모두를 팽개쳤다는 의미다. 돌부처라도 아마 마음이 흔들렸을 터였다.

"헌데 좌선배께서는 개인적으로 누가 보주의 후계를 잇기를 바라시오?"

풍철한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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