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890만번 주사위 던지기>삶이보이는창
게다가 호기심 가질 만한 소재들을 고르고 골라 곶감 엮듯이 이야기를 풀어가니 이야기가 술술 넘어간다. 장영철의 '프로레슬링은 쇼다'라는 한 마디로 프로레슬링 인기가 떨어지던 시기를 비롯, 어깨 문신을 한 사람이면 벌벌 떨던 삼청교육대 사건, 때만 되면 촛불 찾느라 법석을 떨던 등화관제훈련, 김일성에게 보내는 주파수라는 얼토당토 앉은 의심을 받았던 가수 김추자 등 <890만번...>을 보면 1970년대가 한 편의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흑백TV같은 추억 속에 '폭' 빠지게 된다.
책 속엔 1970-1980년대 대형 사건들이 흘러넘친다. 당연히 그 시대를 꼬집겠거니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시백은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 애써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우리네 비루한 일상을 툭 던져놓고, 정말 비루한 게 뭐냐고 질문하는 식이다.
1970년 3공화국 정부의 부도덕성을 보여줬던 정인숙 사건을 말하기 위해 그는 뒷골목 건달패들의 윤간을 앞세운다.
"짐승도 제 자식은 버리지 않으며, 뒷골목의 건달마저도 제 짝이 될 여자의 몸을 함부로 내돌리지 않는데, 지엄 존자를 필두로 나라의 내로라하는 무려 스물여섯의 세도가들이 한 여자를 번갈아 돌아가며 몸을 뒤섞으니, 뒷골목 건달패들이 돌림빵이라 부르는 이 해괴한 짓을 그들은 무어라 부르며 즐겼는지..."
비유를 통해 정부 실력자들을 뒷골목 건달패보다 못한 이들로 끌어내린다. 학교와 군대가 별 차이 없던 포악한 시절을 묘사할 때도, 그는 '베컴의 꽁지머리보다 우리가 더 빠르다'며 '킬킬'거린다.
"한동안 닭 볏처럼 옆머리는 말끔히 깎은 채, 윗머리만 길게 기르는 펑크머리가 유행한 적이 있다. 세계적인 축구스타인 베컴도 한때 그런 머리를 한 적이 있고... 그런데 이 묘한 머리의 효시가 바로 대한민국임을 사람들이 알지 못하더라."
온갖 사투리가 걸쭉하게 넘치고, 역사와 정치를 소리 높여 외치지 않으니 <890만번...>은 큰 부담이 없다. 어렵지 않게 읽힌다. 쉽게 읽히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편하기 때문이다.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못난 사람들이다.
정말 가진 것 없이 못난 사람들도 있지만,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도 못난 것은 마찬가지다. 한 치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김 대위가 졸지에 '바보'가 돼서 연병장을 돌고, 저명한 국문학 교수가 오리와 개의 붙임말인 '오리개'를 마을 이름으로 알고 자랑한 게 대표적이다. 일자무식인 10대 노동자가 온갖 이론으로 무장한 대학생을 당황케 하는 것처럼, 잘난 사람도 이시백의 눈으로 보면 '헛똑똑이'일 뿐이다.
행복의 조건, 현실의 틀에서 벗어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