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은 계곡을 따라 내려오고 안개는 계곡을 따라 피어오른다. 지금 내장산에는 단풍불이 훨훨 춤을 춘다.최종수
인간은 누구나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빚이 하나 있다. 못 다한 효도의 빚이 그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초여름에 아버지를,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가을에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만 했던 나는 한참 지나서야 불효자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다. 부모님과의 추억들이 가물가물 물안개로 번져올 즈음이었다.
저 세상에는 전화가 없다. 그러므로 효도는 살아계실 때만 가능하다. 못 다한 효도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길은 아마도 내가 만나는 모든 어버이를 내 부모님처럼 사랑하려고 애쓰는 일일 것이다.
오늘(11월 6일)은 목숨 다하는 날까지도 다 갚지 못할 ‘평생의 빚’을 조금은 갚을 수 있는 날이다. 호사다마일까. 잔뜩 심술을 부리는 날씨를 걱정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데, 그래도 단풍구경 가나요?”
“어제 밤 소풍가는 손자처럼 잠이 오지 않았어요.” “아침 비에 서울 가라는 말이 있잖아요? 내장산에 가면 비가 그칠 거예요.” 오전 9시, 회색구름이 가득한 남쪽 하늘을 향해 버스에 올랐다.
시내를 빠져나가는 동안 어른들에게 마이크를 드렸다. 감사하는 마음을 모아 출발기도를 바쳤다. 효도 단풍구경 버스는 김제를 지나고 있었다. “자, 지금부터 날씨도 묻지 마, 나이도 묻지 마, 노래만 신나게 불러, 신바람 노래방을 시작하겠습니다.” “짝- 짝- 짝…….”
“좋기도 좋을시고 아기자기한 지고 형제들이 오순도순 한데 모여 단풍구경 가는 것” 즉흥 노래를 시작으로 생음악 노래방이 막을 올렸다.
최고령 할아버지(85세)의 시조 한 가락. “봄은 가고 여름도 가고, 붙잡을 수 없는 세월이 가는구나. 늙어지면 못 노나니……” 비 내리는 고모령, 신라의 달밤, 노새노새 젊어서 놀아…… 모두가 박수치며 신바람이 났다. 손자의 재롱을 보는 것도 흥겨운데, 성직자의 재롱을 보고들 있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맨 앞좌석에 앉아 있는 할머니 한 분. 1988년 5월 명동성당에서 올림픽 남북공동개최를 외치며 할복투신한 조성만 열사의 고모가 마음 한켠을 어둡게 했다.
“우리 어머니 노래 한 자리 하셔야지요.”
“귀가 먹어서 무슨 노래를 하는지도 모르는 병신이 뭔 노래를 헌다요. 다른 사람 시키세요.”
“어머니~이, 어머니께서는 귀가 먹어서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들을 수 없지만 다른 분들은 다 들을 수 있잖아요. 그러니 어머니께서 노래를 부른다면 여기 있는 어르신들이 얼마나 기쁘고 즐겁겠어요. 안 그래요? 그러니까 자, 한 곡만 하세요~ 이~잉, 하셔이~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