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유령 그리고 어머니의 둥그런 허리

[시와 함께 살다 36] 항아리가 있는 풍경

등록 2006.11.14 15:00수정 2006.11.14 16:11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변소에 대한 약사(略史)

옹기는 뒤뜰 장독대에
앉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허리가 동그란 옹기를 안고 있으면
어머니를 안고 있는 기분이 든다.
두툴두툴한 옹기의 촉감이 설운 것도 그 때문이다.
지붕이 없는 변소에 앉아
어두컴컴한 땅 밑에 웅크리고 있는
옹기의 구멍을 내려다본다.
옹기는 이 집 내력을 알고 있다.
태어나서 내가 버려졌다는 느낌으로 울었던 것도
저 밑을 바라보면서이다.
파묻은 김칫독처럼 발효하는
옹기는, 저 움푹움푹 팬
밑바닥에서 깨어져나가며,
꿈을 꾸고 있을 것이다.
썩는 것은 따뜻하다.
지붕 없는 설움으로 떠도는 식구들이
들락거리며 별과 새와 구름을 보았던 곳,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창비시선 216 박형준 시집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에서)


누구의 소설인지는 잊었지만, 밤새 내리는 하얀 눈을 맞으며 마당 한 구석 장독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항아리들을 '겨울밤의 유령들'이라고 묘사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쏟아지는 하얀 눈송이들이 던져주는 희미한 빛에 언뜻언뜻 드러나 보이는 장독대의 시꺼먼 항아리들은 상상력 풍부한 이들에게는 그런 연상을 불러일으킴직도 하다.

유령치고는 많이 비만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항아리에서 유령을 연상하는 이러한 상상력은 내게도 낯설지 않다. 둥근 모자를 깊이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린 채 깊은 침묵 속에서 더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검은 유령들…. 그래서 어쩌다 어두컴컴한 밤에 마당의 장독대를 바라보게 되노라면, 겨울이 아니더라도 으스스 찬 기운이 느껴져 소름이 돋고는 했다.

이런 느낌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항아리들이 모여 있는 '장독대'라는 특수한 공간을 잃어버리게 되면서 점점 희미해졌지만, 지금도 가끔씩 석관동 옛집을 떠올릴 때면 그 느낌이 되살아나곤 한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약 5년 동안 살았던 석관동 집은 콘크리트 마당의 오른쪽 편에는 우리가 뒷간이라고 흔히 부르는 푸세식(?) 변소가, 왼쪽 편에는 창고로 쓰던 키낮은 광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광의 지붕을 우리는 장독대로 사용했었다.

용인 민속촌에서 만난 장독대
용인 민속촌에서 만난 장독대정철용
한밤중에 요의를 참지 못해 깨어나 무서움에 떨면서 마당을 가로질러 뒷간으로 가면서 아직 어렸던 나는 광 위의 장독대를 바라보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하지만 마음은 그러면서도,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오히려 그 틈을 타서 유령들이 내게 달려들 것만 같아 내 눈길은 자석에라도 끌린 듯 저절로 장독대 쪽을 향하곤 했다. 마치 내 눈길이 유령의 손길을 막아내는 방패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당을 건너 뒷간까지는 무사히 닿았다고 해서 안심할 일은 아니었다. 이제는 장독대의 검은 유령 대신에 냄새나는 뒷간의 아래쪽 어둠 속에서 불쑥 솟아 나올지도 모르는 귀신의 빨간 손을 대적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뒷간의 발판에 서는 순간, 귀신의 빨간 손이 내 발목을 꽉 붙잡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질려, 나는 변소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문밖에 선 채로 대충 겨냥하여 볼일을 보곤 했다. 다음날 아침, 어머니로부터 지청구를 먹을 게 분명했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내가 볼일을 다 마칠 때까지 귀신이 출몰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렇게 무사히 볼일을 마치고 마당을 가로질러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는 다시 장독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공포가 아닌 평안한 마음이었으면 좋으련만, 항아리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장독대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내게 달려들 것만 같은 느낌이 여전히 들어, 나는 후다닥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곤 했다.


사실 둥그런 뚜껑을 머리에 이고 앉아 있는 커다란 항아리들의 자태란 어쩐지 사람과 닮은 모습이어서, 어둠 속에서 힐끗 보면 그게 항아리인지 사람인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아주 심각한 복부비만이 아닌 다음에야 사람의 몸매를 어찌 항아리에 비유할 수 있으랴마는, 박형준 시인이 위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동그란 옹기는 어머니의 두둑한 허리를 연상시키는 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느낌에 더해서, 초등학교 시절에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읽었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이야기는, 내가 항아리를 볼 때마다 늘 사람의 몸을 연상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알리바바가 훔쳐간 보물들을 되찾기 위하여 기름 장사로 변장한 도적 두목이 수레에 싣고 온 커다란 항아리들처럼, 이 세상의 모든 항아리들의 뱃속에는 사람이 하나씩 들어가 앉아 있으리라고 내게는 여겨졌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대낮에는 밖으로 나올 수 없고 어두워져야 살그머니 뚜껑을 열고 나올 수 있으니, 유령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닌가! 알리바바는 지혜로운 아내를 둔 덕택으로 도적의 졸개들을 항아리 속에서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정말로 항아리의 유령들이 된 것이다!

알리바바가 그 항아리들을 어떻게 처리했는가에 대한 후일담이 없기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이 재미난 이야기 속의 항아리들 중에서 몇 개쯤은 비단길을 통해서 우리 조선 땅에까지 흘러 들어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전부는 아니더라도 정말 몇 개쯤은 유령을 품고 있는 항아리들이 아직도 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리고 그런 항아리들 중에서 유난히 커다란 것들은 어느 가난한 민가의 변소 아래서 오줌과 똥덩어리를 받아내는 용도로 쓰였을지도 모르는 일.

박형준 시인이 어릴 때 살던 집이 그런 집들 중의 하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시인은 나처럼 무서워하기는커녕, 지붕도 없는 그 변소에 앉아서, 그 아래 자신의 똥을 받아내고 있는 옹기의 꿈을 읽고 있으니 놀랍다. 항아리를 보는 그의 눈길에는 항아리의 유령보다는 어머니의 두둑한 허리가 먼저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리라.

암사동 집 장독대의 항아리들
암사동 집 장독대의 항아리들정철용
항아리에서 검은 유령을 먼저 보든, 어머니의 두둑한 허리를 먼저 보든 간에, 항아리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네 삶의 희비애락을 함께 나누어 왔다. 장독대의 항아리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온갖 맛을 담아내었고 땅에 파묻은 김장독들은 오랜 시간 발효되었다가 어느 순간 솟아나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 삶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었다. 그런가하면 위 시에 나오는 것처럼 변소 아래 묻혀 있는 옹기들은 썩어서 오히려 따뜻해지는 생명의 순환을 꿈처럼 보여주었다.

그런데 오랜 세월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함께 했던 항아리들이 이제는 좀처럼 만나보기 어려운, 말 그대로 이 시대의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파트에 밀려서 단독 주택이 점차 사라지면서 자신의 터전인 장독대를 잃어버리게 된 슬픈 항아리들….

이 사라져 가는 장독대의 검은 유령들을 지난 겨울, 한국 방문길에 만났다. 용인 민속촌의 어느 초가집 뒷마당에서. 어머님과 아버님이 아직도 노모를 모시고 살고 계신 암사동 집의 베란다 계단 옆 마당 한 구석에서. 그러나 그 항아리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는 더 이상 유령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세워져 있는 것보다 엎어져 있는 것이 더 많았고, 사람 몸이 들어갈 정도로 큰 독보다 작은 단지 크기의 자잘한 항아리들이 더 많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뚜껑을 열어 그 속을 확인하는 대신, 그저 한두 번 항아리들의 둥근 배를 두드려 주었을 뿐이다. 아무 것도 들어차 있지 않은 항아리들의 빈 뱃속에서는 맑은, 그러나 슬픈 소리가 들렸다. 늙은 어머니의 동그란 허리를 안고 가만히 등을 두드리면 들릴 것 같은 그런 텅 빈 소리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2. 2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보수논객 정규재 "이재명 1심 판결, 잘못됐다"
  3. 3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중학교 졸업여행에서 장어탕... 이건 정말 '세상에 이런 일이'
  4. 4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남자선배 무릎에 앉아 소주... 기숙사로 가는 내내 울었다
  5. 5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단독] 조은희 "명태균 만났고 안다, 영남 황태자? 하고 싶었겠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