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끄트머리 진도에 또 다른 고려가 있었다!

등록 2006.11.18 08:57수정 2006.11.18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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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끝자락의 든든한 섬 진도는 문화예술과 호국 충절의 고장이다. 그 중 이번에는 호국 충절에 포인트를 맞춰 진도의 역사속으로 들어가 두루 둘러 보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장군의 활동 무대가 되었으며, 정유재란 때 울돌목에서 있었던 명량대첩지의 무대였던 명량해협 자리인 진도대교, 고려시대 대몽항쟁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과 남도석성을 소개하려고 한다. 필자는 답사를 다녀온 뒤에 국사를 다시 한번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되짚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답사에 참여했던 분들로부터 학교에서 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반성의 의미도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진도대교

진도대교는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사이를 잇는 다리이다.  진도대교는 정유재란때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선을 무찌른 명량대첩지 울돌목 위에 놓여 있다. 울돌목이란 '소리를 내어 우는 바다 길목'이라는 뜻의 순 우리말이고 한자어로는 명량해협이라 불린다.

진도는 지난 1984년에 해남과 진도를 잇는 진도대교가 생겨 육지와 연결이 수월해 졌다고  볼 수 있다.

녹진 전망대에서 명량대첩에 대해 설명중인 진도 향토 사학자 박주언씨

녹진 전망대에서 울돌목을 가리키며 정유재란 당시 명량해협에서 벌어졌던 명량대첩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1597년 9월 16일 현 진도대교 일대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은 12척의 배로 300여척에 이르는 막강한 전력의 일본군을 맞아 기적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약 2,500명의 일본수군이 전사해, 시체는 일곱물인 사릿발 조류 따라 멀리 흘러갔다.

진도사람들은 일본군의 시체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 산은 왜덕산이라 불리는데, 떠밀려오는 일본 수군 시체 100여 구를 수습하여 양지쪽에 묻어 공동묘지를 만들어주어 붙여진 이름이다. 가해자인 일본수군들의 시체를 가장 인도적으로 처리해주는 바다사람들의 관습에 집단적으로 합의하고 이를 공동으로 수행한 점이 관심을 끈다.

설명을 들으며 탁트인 녹진전망대에서 바라본 진도와 해남 바닷가 풍광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다 날려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쾌하고 가슴이 트이는 기분이랄까? 가족과 함께 다시 찾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용장사 쪽에서 바라본 용장산성 터 (국가지정 사적 제126호)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석축산성으로 사적 제126호이다. 현재 용장산 기슭에 약간의 석축이 부분적으로 남아있고, 성내에 용장사지와 행궁지가 남아있다. 축성연대는 1270년 6월 이후이며 삼별초의 대몽항쟁 근거지였던 곳이다. 용장산성은 둘레가 13km에 이르는 거대한 산성이었다. 현재 성안에는 남북 9단 동서 3단의 석축과 건물 터, 우물 등이 있다. 용장성은 몽고에 무릎을 꿇은 고려 조정에 반발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킨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게 패해 제주도로 퇴각하기까지 원종 11년(1270) 8월부터 9개월 동안 항몽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삼별초는 이곳에서 부서를 정하고 관부를 열었으며, 궁궐과 성곽을 쌓고 몽고 침략자와 개경 정부에 반기를 들어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여 왕실과 대립되는 정권을 세웠는데, 이 때 쌓은 성이 용장산성이다.

용장산성과 삼별초군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객들

설명을 듣고 산성터를 둘러 봤지만, 그 시대의 대몽항쟁이 얼른 체감이 되지는 않았다. 보기에는 평범한 산아래에 있는 높이 쌓여 있는 돌담처럼 보였다. 역사에 무지함을 느낀 순간이랄까?

남도석성(국가지정 제 127호)을 걷고 있는 답사객들

남도석성은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산성으로 고려 삼별초 항쟁때 배중손 장군이 여몽 연합군과 격전을 치르다 최후를 마친 곳으로 전해진다. 높이 4m, 폭은 2.5~ 3m 가량이며 둘레가 526m인 옛 성이다. 동서로 길게 직사각형 모양으로 된 이 돌성은 동서남쪽 세 방향으로 터져 있는 열린 돌성이다. 서쪽 입구만 돌이 일부 허물어져 있을 뿐 전체적으로 수백년의 세월을 굳건히 견뎌내며 옛 모양을 자랑하고 있다. 둥그런 성벽과 동 서 남문이 거의 그대로 있으며 서문 양 옆에 밖으로 튀어나온 치가 있다. 성안에는 민가가 수십 호 들어차 있고 마을 사람들은 오늘도 옛 성문을 통해 출입한다.

성곽을 걸으며 성 안 밖을 둘러보고 있다.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이 성을 쌓았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은 삼국시대부터 이 곳에 어떠한 형태로든 성이 있었고 그 후 시대에 따라 여러 차례 개축된 것으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남도석성 내에 있는 관아

남도석성 안에 있는 민가와 진돗개

남도석성 남문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 문을 통해 드나 든다.

남도석성 쌍홍교

남도석성 남문 앞으로 흘러가는 가느다란 개울 위에는 쌍홍교와 단홍교 두 개의 홍교가 놓여 있다. 단홍교가 언제 놓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쌍홍교는 8.15광복 직후에 마을 사람들이 놓았다고 한다. 두 다리 모두 편마암질의 편석을 겹쳐 세워 만들었다. 규모는 작지만 편마암 자연 석재를 사용하여 홍교를 놓은 것은 전국적으로 유례를 찾기 드문 특이한 양식이다.

남도 끄트머리 작은 땅 진도에서 둘러본 역사 유물들은 이 땅에 우리를 지키고자,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열정들이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도 고이 간직한 우리의 정신, 우리의 문화, 그것이 진도의 뿌리고 힘임을 인식하는 시간이었다.

가을날 좋은 사람들과 진도땅을 두루 돌아보는 여행을 권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 지난 11월 12일 광주민속박물관대학 문화유적답사를 다녀왔습니다.
* 광주광역시교육연수원에서 발행한 책인 <우리 고장의 문화 유적을 찾아서-진도편>과 진도군에서 발행한 소책자 <진도 이야기>를 참고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1월 12일 광주민속박물관대학 문화유적답사를 다녀왔습니다.
* 광주광역시교육연수원에서 발행한 책인 <우리 고장의 문화 유적을 찾아서-진도편>과 진도군에서 발행한 소책자 <진도 이야기>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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