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소에서 무슨 일이?

세탁소에서 바라 본 사람 풍경

등록 2006.11.28 16:09수정 2006.12.0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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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에 없는 세탁소 캐시어가 되었다. 정식으로 일하는 건 아니고 아는 분의 부탁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잠깐 봐주는 정도의 일이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가한 이곳 픽업(pick-up)세탁소에서 내가 하는 일은 세탁물을 받거나 맡긴 세탁물을 내주는 단순한 일이다.


월급쟁이 공무원인 아버지의 딸로 자라 학교에서 월급 받는 월급쟁이가 되었고 나같이 월급 받는 남편을 만나 월급쟁이 아내로만 살아온 나였다. 그런지라 만나는 사람들도 무척 제한적이었던, 조금은 밋밋한 생활이었다.

그런데 이곳 세탁소는 다양한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찾아오는지라 얼마나 흥미로운지 모른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생생한 '체험! 삶의 현장'이다.

이곳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들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여유 있는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좋은 음악을 듣기도 하면서 책도 읽고 글도 쓰는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창 밖도 바라보고.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창 밖도 바라보고.한나영

#1. 키 작은 것도 서러운데

“이거 새로 산 청바지인데요. 이만큼 줄여주세요.”


유명 메이커도 아닌 보통의 청바지를 들고 온 키 작은 여자, 길이를 줄이는 데 10달러 정도인 만 원의 거금(?)을 써야 한다. 허리 품이나 허벅지라도 줄이려면 그 곱절이 들어가니 결코 작은 돈이 아니다. 그나마 이곳이 시골인지라 이렇게 싸다고 하니…. 인건비가 비싼 미국에서 키 작은 것도 죄라면 죄?

“옷을 살 때마다 매번 줄이려면 귀찮겠어요.”
“그럼요. 키 작은 것도 서러운데 입는 옷마다 길어서 매번 생돈을 들여야 해요. 속상해요.”



‘그러게 왜 키 큰 사람 많은 미국에서 태어나서 고생하시나. 우리나라에 가면 짧은 바지도 많고 바지 줄이는데도 2~3천원이면 뒤집어 쓰는데.’

#2. 마누라 자켓 다려 달라고 빗속을 뚫고 온 남자. 당신, 혹시 경처가?

“이것 좀 다려줘요. 마누라 자켓인데.”
“드라이는 안 하고요?”
“네, 다림질만 해줘요.”


빗속을 뚫고 남자가 가져온 S사이즈 체리핑크 자켓.
빗속을 뚫고 남자가 가져온 S사이즈 체리핑크 자켓.한나영

‘니 마누라 옷, 마누라 더러 직접 다리라고 하든가, 아니면 니가 좀 다려주지. 이렇게 비가 억수로 오는데 그깟 자켓 하나 달랑 들고 이 빗속을 뚫고 와야 쓰겄냐? 다림질만 해도 5 달러나 되는데.’

남자가 가져온 체리핑크 자켓을 내려다 보며 이런 생각을 하지만 짐짓 ‘왕’인 고객 앞에서는 웃음을 띠며 이렇게 대답한다.

“아, 예. 언제 찾아가실래요? 내일이요? 그럼 5시 이후에 오세요.”
“OK. 내일 내가 올 거예요. 아니면 우리 마누라가 올 수도….”


‘니가 또 찾으러 온다고? 마누라는 이 S사이즈 체리핑크가 잘 어울리는 공주? 손 하나 까딱 안 하는.’

(마음대로 상상하면서 다시 환한 얼굴로) "그러세요. 좋은 하루 되세요.”

#3. 포옹하다가 화장품이 묻었다고요?

"제가 목사인데요, 이건 교회에서 입는 가운이에요. 여기 얼룩이 보이죠? 여자 성도와 포옹(hug)을 하다가 그만 화장품이 묻어 버렸어요. 특별히 신경 써 빼주세요.”

흰 가운과 셔츠 다섯 벌을 가지고 온 아시아계 남자가 가운에 묻은 화장품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한다. 이곳 미국에서는 양 팔을 벌려 껴안는 포옹이 우리의 인사나 악수 정도로 가벼운지라 포옹을 했던 것인데 그만 여자 성도의 진한 화운데이션이 목사님 가운에 얼룩을 남기고 만 것이다.

“이 가운하고 흰색, 검은 색 셔츠는 교회에서 부담할 거고요. 나머지 세 벌 드레스셔츠는 제 거예요. 제가 돈을 낼 거니까 따로 계산해 주세요.”

공과 사가 분명한 목사님의 경쾌한 편가르기(?)가 기분 좋게 느껴진다. 혈세로 움직이는 관용차를 부인이 사적으로 타고 다녔다는 유쾌하지 못한 소식이 들려오는 우리나라와는 대조적이다. ‘공은 공, 사는 사!’

“그런데 목사님은 어디에서 오셨어요? 혹시 인도?”
“맞아요. 미국 시민이지만 원래는 인도예요. 인도에서 교수를 했고요. 이곳에서 신학을 다시 공부해서 지금은 교회를 개척했고, EMU(이스턴 메노나이트 대학)에서 히브리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히브리어 어렵다던데 머리가 좋으신가 봐요.”
“어디에서 오셨어요? 한국이요? 내 친구 중에 한국 사람 많은데. 한국 사람 머리 정말 좋아요. 혹시 배 박사 알아요? 정신과 의사인 닥터 배?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살기도 했는데."


세상은 좁다. 이곳에서 고작 두 번 만났던 배 박사를 인도 목사님도 알고 있다.

#4. 미안해요. 부인이 죽었다고요?

“쿠폰을 가져왔어요. 쿠폰이 있으면 할인이 된다면서요.”
“그럼요. 지금 개점 행사로 할인 기간이거든요. 할아버지, 쿠폰 종류가 많은데 어떤 쿠폰을 쓰시겠어요? 완전히 반 값만 내면 되는 ‘50% 할인’ 쿠폰도 있고, 세 벌을 두 벌 값에 하는 ‘3 for 2’ 쿠폰도 있고, 셔츠는 무조건 99센트만 내면 되는 쿠폰도 있는데…. 할아버지가 가져온 옷이 몇 벌 안 되니까 오늘은 ‘3 for 2’를 쓰시고 다음에 할머니 옷이랑 많이 가져오셔서 반값 할인을 받으세요.”

“아내는 죽었어요. 3년 전에 암으로.”
“오, 저런…. 몰랐어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럼 식사는 누가?”

“혼자 해 먹어요.”
“자식들은…”

“다 나가서 살지요. 밥은 주로 전자레인지로 해 먹어요. 전부 집사람이 해줘서 하나도 몰랐었요.”


음식을 사다가 전자레인지를 이용해서 끼니를 해결한다는 할아버지를 보니 마음이 짠했다.

“이렇게 젊으신데….”
“젊다뇨? 올해 나이가 93인데.”

“뭐, 뭐라고요? 아흔 셋이라고요? 와, 저는 70대인 줄 알았어요.”


카메라가 있었으면 찍었을 텐데…. 아흔 셋이면 적은 나이가 아닌데도 할아버지는 아주 건강해 보였다.

‘저렇게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살 수만 있으면 장수의 복을 누리는 것도 괜찮을까. 운전도 혼자서 저렇게 잘하는데. 아, 안 돼. 혼자만 저렇게 살면 뭐해? 곁에 말동무도, 친구도 없는데. 혼자만 오래 살믄 무슨 재민겨.’

세탁소에서 바라본 사람들의 사는 모습은 나를 생각이 깊은 철학자로 만들어 준다.

'체험! 삶의 현장'에서 생각 깊은 철학자가 된다.
'체험! 삶의 현장'에서 생각 깊은 철학자가 된다.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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