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한 사람 향기가 느껴지는 '옛집'

삼각지 국수집 '옛집'에 가다

등록 2006.11.22 14:23수정 2006.11.2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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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6호선 삼각지역 2번 출구에서 바로 나오는 왼쪽 골목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보이는 허름한 국수집 '옛집'.

a 삼각지 '옛집' 간판.

삼각지 '옛집' 간판. ⓒ 이주희

7년 전 SBS에 소개된 후, 한 사내가 담당 PD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고맙다는 말만 연거푸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사기를 당해 재산을 몽땅 잃고 아내까지 떠나버린 사내. 음식점마다 한 끼를 구걸했으나 번번이 쫓겨나던 이 사내가 '옛집'에 들어와 국수를 허겁지겁 먹자, 주인 할머니 배혜자씨가 그릇을 빼앗더니 국수와 국물을 한 가득 더 내줬다. 두 그릇을 먹은 사내가 달아나자 배씨가 따라나와 "그냥 가, 뛰지 마, 다쳐"라고 외쳤다고 한다. 사내는 이 한 마디에 세상에 대한 증오를 버리고 이민 가서 성공했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는 예전에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이 일화가 소개된 후 시간이 많이 지났다. '옛집'은 지금 어떻게 변화했을까? 12일 오후 3시, '옛집'을 찾았다.

a 삼각지 '옛집' 메뉴. 국수값은 10년째 2000원이다.

삼각지 '옛집' 메뉴. 국수값은 10년째 2000원이다. ⓒ 이주희

"언론 보도로 많이들 감동했다고 오시는데 좀 부담스럽기도 해요. 우리한테는 사람들 도와준 게 별거 아닌데, 그냥 우리 마음을 보여 드린 건데. 일본 관광 책에까지 소개가 되기도 했지만 저희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알려지니까 부담스럽습니다."

'옛집' 주인 할머니의 딸 김진숙씨의 말이다. 현재 김씨는 가게 일을 돕고 있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도 우리끼리 밥 먹은 적이 없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저희 엄마가 지나가는 사람 보이면 불러서 먹이고. 나도 신랑이랑 애들 있지만 애들 놀러오면 손님들이랑 같이 둘러앉아서 먹고 그래요."

'옛집'의 주인 할머니 배혜자씨는 일찍 남편을 암으로 잃고 혼자 힘으로 아이들 4명을 키웠다고 한다. 김씨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딸과 아들 3명을 시집, 장가보낸 어머니가 대단하다고 말했다.

'옛집'의 단골손님들은 모두 10년이 넘도록 꾸준히 들르시는 분들이라고 한다. "손님들이 다 좋으세요. 우리가 바쁠 땐 손님들이 잡수시고 그릇 내주고 돈 통에서 돈 거슬러 가시고 탁자까지 다 닦아 주세요. 그러면 오히려 주인이 손님 대접을 받는 거 같아요."

가게 근처에 국방부가 있어 국방부 사람들이 대부분 단골이라고 하는데 이런 손님들과는 사위, 막내라는 호칭을 써가면서 가족 같이 지낸다고 한다.

a 할머니의 딸 김진숙씨.

할머니의 딸 김진숙씨. ⓒ 이주희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인 그 '사내'에게선 따로 연락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 분은 저희에게 진 빚을 다 갚으셨어요. 그분 덕에 우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으니까요. 만일 이 기사 보시면 이제 마음의 짐 덜어놓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훈훈한 사연이 많은 '옛집'. 2000원짜리 온국수를 많이 팔았기에 가게를 넓힐 법도 한데, 넓힐 계획은 없다고 한다. 배혜자 할머니는 돈이 남으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어 하신다.

a 10년 전 가격 그대로 2000원인 온국수.

10년 전 가격 그대로 2000원인 온국수. ⓒ 이주희

아직도 돈이 없는 사람이 와서 국수를 달라고 청하면 멸치로 우려낸 뜨거운 국물에 담긴 시원한 면발과 아삭한 신 김치를 가득 내어주시는 '옛집' 할머니와, 자리를 뜨는 기자에게 '학생이 고생한다'며 홍삼 드링크를 선뜻 건네주신 할머니의 딸. 그들이 있기에 '옛집'의 잔잔한 향기는 아직까지 그 빛을 잃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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