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79회

등록 2006.11.24 08:20수정 2006.11.24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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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상황만 놓고 본다면 가장 유리한 쪽은 다섯 제자 중 장문위와 모가두다. 하지만 이미 모가두는 후계다툼에서 밀려난 지 오래되어 보이는 몰골이었으니 자연 장문위를 떠올릴 수밖에….

“오해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두고 봐야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네. 단순히 후계자 암투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몰고 가기엔 피살당한 인물들의 면면이 그리 가벼운 존재들이 아니네. 나중에라도 시산혈해를 가져올 사건들이란 말이네.”


“일단 모가두도 배제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세상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일이 왕왕 일어나는 법이니 말이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보이지 않는 일을 처리하기 위해 굳이 우리를 부를 필요도 없었을 걸세.”

“물론이지.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 일부에 불과하네.”

“그렇다면 서당두와 윤석진의 죽음은 어찌 보고 있나?”

“흉수가 단서를 없애기 위한 부수적인 일이라고 봐야지. 물론 서당두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네. 뜻밖에도 그는 일련의 사건 속에서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단 말이네. 그런데도 흉수가 시급히 그를 가장 먼저 죽였다는 사실이 오히려 이상한 생각이 들게 만드네.”

서당두, 서교민은 확실히 일련의 사건과는 색깔이 다른 죽음이었다. 후계자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운중보와 관련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저 신태감을 모시고 처음 운중보에 온 사람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흉수는 서교민이 운중보에 들어오자마자 손을 썼고 독룡아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결국 우리는 구룡의 무공이 나타나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 같군.”

불쑥 던지는 그 말에 함곡은 풍철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역시 풍철한은 지금 여러 가지 가능성과 함께 깊게 생각했음에 틀림없었다.


“자네 생각이 옳네. 구룡의 후인이든 아니든 구룡의 무공을 익힌 자들이 기회를 노리다가 이번 후계자 결정으로 인해 중원 문파들이 패가 갈리고 소란스러워지자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보아야지.”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겠지.”

이미 풍철한도 많은 생각을 하고 난 뒤였다. 지금 함곡이 말한 내용은 자신도 역시 하나하나 정리해 본 상태였다. 그럼에도 아무런 결론이 나지 못하고 어느 방향으로 조사해 나갈지도 암담해지자 초조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만을 한정해 평가한다면 이 정도라네.”

“빌어먹을…. 다시 원점으로 왔군. 그렇다면 이렇듯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가 뭔가?”

“주어진 정보에 한계가 있어 추론 역시 한계가 그어진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 아닌가? 우리는 지금부터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부지런히 만나보아야 하네.”

“결국 그 말 하려고 지금까지 그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았나?”

투정부리듯 말하는 풍철한을 보며 함곡의 실소를 터트렸다. 덩치 큰 풍철한은 어느 때보면 투정부리는 어린애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푸웃…. 중요한 것은 흉수의 살해동기가 아니라 이러한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 필연적인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방향이 설정되었다는 점이네. 한편으로는 자네의 생각이 내 생각과 일치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네. 무엇을 조사해야 할지 생각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네. 왜냐하면 일단 사람들을 되도록 많이 만나려면 자네와 내가 따로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네.”

풍철한은 함곡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이제 주어진 시간은 나흘이 채 남지 않았다. 방향을 잡지 못하고 오늘을 허비하면 더욱 초조해져 우왕좌왕하게 된다.

“오시(午時)가 되기 전에 자네와 나는 적어도 일곱 사람을 만나야 하네.”

함곡의 말에 풍철한이 고개를 끄떡였다. 함곡이 말한 일곱 사람이 누군지 짐작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보주와 둘째제자인 옥기룡, 그리고 추교학을 만나겠네.”

풍철한의 말에 함곡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덩치 큰 어린애 같아도 신중함과 두뇌 회전만큼은 자신과 못지않은 친구였다.

“자네는 약은 친구야…. 결국 나는 성곤어른과 회운사태, 대제자인 장문위와 만보적 상대인을 만나야겠군.”

철담이 살해되기 전 매송헌에 들렀던 성곤과 회운사태는 반드시 만나야 할 인물들이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다만….”

풍철한은 시선을 돌려 아무 말 않고 듣기만 하고 있던 능효봉과 설중행을 바라보았다. 사실 마음이 맞는 놈들이었다. 일을 크게 벌여 놓기는 했어도 눈치도 빨라 아침에 상교교를 처리하는 것을 보면 많은 도움이 될 놈들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렸다. 분명 혈간의 죽음에는 저 자식들이 관련되어 있었다. 더구나 자신의 직감은 기이하게도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과 저 자식들이 관련되어 있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특히 자신이 얼떨결에 데리고 들어온 설중행 저 자식이 문제였다. 운중보와 관련이 있고, 감추어진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신의 직감은 틀린 적이 거의 없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직감이 틀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놈이 설중행이었다. 설중행 저 자식의 성격으로 보아 거짓말을 할 놈은 아니었다. 운중보와 관련이 있는 것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 사건의 중심에 저 자식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느냔 말이다.

저 자식이 이 사건의 중심에 있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저 자식 역시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 그러고 보면 뭔가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놈이 그 옆에 앉아 있는 능효봉이라는 능글맞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저 녀석은 아무리 닦달을 해도, 어떻게 회유해도 털어놓을 놈이 절대 아니었다.

“왜 자꾸 위아래로 훑어보고 난리를 치는 거요? 아직까지 그 계집 좀 혼내줬다고 그러는 거요? 걱정 마시오. 그 계집…, 내가 마음만 먹으면 오늘 저녁이라도 내 배 밑에 깔고 잘 수 있소.”

여전히 능청스런 능효봉의 말이었다. 너무 자신이 있는 말투여서 오히려 듣는 사람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할 정도의 능효봉이라도 심했다 싶었는지 같이 자리하고 있는 선화의 눈치를 보듯 힐끗 쳐다봤다.

“여자 후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지? 하기야 얼굴도 반반하겠다….”

풍철한이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는 듯 비꼬듯 말하자 의외로 선화가 입을 열었다.

“능대협의 말씀이 옳을지 몰라요. 아까 상교교의 눈빛을 보니 그럴 가능성도 많더군요. 표독한 눈빛에 왠지 상대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기색도 서려 있더군요. 그 동생인 상민민이 설소협에게 반한 것 같은 기색과 마찬가지로요.”

지금까지 일행들과는 한 번도 대화를 하거나 같이 있는 자리에서도 한 마디 하지 않았던 선화가 입을 열자 좌중은 정말 놀랐다는 듯 일제히 선화를 쳐다보았다. 더구나 서리가 풀풀 날릴 것 같은 그녀의 입에서 두 사람을 놀리는 듯한 말이 나오자 더욱 놀라웠다. 얼음덩이 같은 여자도 농담을 할 줄 아는 걸까?

“눈 한 번 똑바로 마주친 적도 없는 여자가 나에게 반했다면 아마 그 여자는 미쳤거나 사내에 환장한 여자일 거요.”

어차피 농이라고 생각한 대답이었다. 그저 지금껏 냉기만 풀풀 날리던 여자가, 거기다가 풍철한과 뭔가 관계가 있는 듯 보이기는 한데 말조차 붙이기 어려운 여자가 농을 걸었으니 농으로 대답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했다.

“사내들은 여자를 모르죠. 상교교란 여자는 매우 충동적이에요. 그에 반해 상민민은 소심할 정도로 신중하죠. 하지만 여자는 자신의 남자를 택할 때 자신의 성격에 비추어 놀랄 정도로 다른 태도를 보이며 선택을 할 때가 많아요. 상민민은 설소협을 네 번이나 주의 깊게 보았어요. 설소협이 그걸 느끼지 못했을 뿐이죠. 더구나 설소협을 보던 눈빛의 의미는 여자라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었어요.”

“캬아…, 대어가 물렸군. 잘 하면 두 녀석 모두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겠는걸….”

풍철한이 빈정대며 말을 하자 선화가 샐쭉 눈을 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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