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11월 4일 서울 마포구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해 전자방명록에 "치열한 삶으로 역사의 진보를 이루셨습니다. 치밀한 기록으로 역사를 다시 쓰게 할 것입니다"라고 썼다.연합뉴스
지난 11월 4일 노무현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와 함께 김대중도서관을 방문해 최근 개관한 전시실을 둘러보고 사저를 방문해 부부 동반으로 오찬을 함께 했다. 현직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의 사저를 방문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토요일임을 감안해 이날 일정에는 이병완 비서실장과 부속실 직원들만 동행했다.
이어 11월 7일엔 노 대통령이 지역혁신박람회가 열린 광주를 방문했고, 그 다음날엔 DJ가 유엔 ESCAP(아시아 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 교통장관회의가 열린 부산을 방문했다. 둘 다 오래 전에 확정된 행사였다. 더구나 ESCAP 교통장관회의는 유엔의 국제행사로 DJ는 오래 전에 기조연설을 요청받았다. 따라서 광주·부산 행사에 노 대통령의 사저 방문 일정이 '끼어들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언론은 전·현직 대통령이 서로 상대방의 정치적 고향을 교차 방문한 것은 '정계개편의 신호탄'이라고 썼다. 그러자 이병완 비서실장은 6일 기자들에게 "영부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런 무거운 이야기를 했겠냐"면서 "북핵문제에 대해 평소 갖고 있던 생각을 다시 쭉 말씀하셨고 노 대통령께서는 주로 들으셨다"고 말해 정계개편이나 대북특사 이야기를 일축했다.
이병완 실장은 오찬 배경에 대해서는 "사전에 김대중전시관을 관람하기 전에 김대중 전 대통령과 차 마시고 환담하기로 돼 있었다"면서 "그쪽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차만 마시고 갈 것이 아니라 식사라도 하자는 제의를 받아 목요일(2일)쯤 일정이 확정됐다"고 밝혔다.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도 6일 기자들에게 "김대중도서관 방문에 대해 억측이 많은데, 방문 제안은 지난주 초(10월말)였고 최종 확정은 지난 목요일(2일)이었다"고 해명했다. 이병완 실장은 "(도서관 방문기사가) 동정 수준으로 나올줄 알았다"면서 "기자들의 창의적 상상력이 대단하다"고 비꼬았다.
그러나 청와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오찬 대화' 내용에 대한 정치권과 언론의 의심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노 대통령과 가까운 김혁규 열린우리당 의원은 8일 "향후 정계개편의 동력(動力)이 두 사람에게서 나올 것"이라고 '군불'을 땠다. 한나라당은 "(만남 자체가) 정계개편을 염두에 둔 정치적 행위"라고 비난했다.
정치권에서는 심지어 이날 오찬에 이병완 실장뿐만 아니라 전날(3일) 형집행정지로 출소한 박지원 전 비서실장이 동석해 국내정치 현안을 논의하면서 DJ의 '호남표 몰아주기'와 노 대통령의 '햇볕정책' 지속이라는 '맞교환'이 이뤄졌다는 그럴 듯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DJ 사저 방문은 빚 지고는 못사는 노 대통령의 '결벽증' 때문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왜 사저를 방문했으며 두 사람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한 마디로 요약해 노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을 찾은 것은 빚 지고는 못사는 노 대통령의 '결벽증' 때문이다.
청와대측에 따르면 오찬 일정이 확정된 것은 목요일(2일)이다. 이날 노 대통령과 DJ는 의미있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노 대통령은 2일 '외국인 투자유치 보고회'에서 북한의 핵실험 이후 대북정책의 방향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에서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평화의 전략, 그리고 나아가서는 미래 동북아시아의 어떤 공동체를 향한 통합의 전략, 이런 부분들은 결코 거역할 수 없을 것"이라며 "(김영삼 대통령처럼) 대화의 단절을 선택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대통령은 한국에서 더 이상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은 연세대에서 김대중도서관 후원회가 열린 날이다. 이날 후원회에 참석한 김 전 대통령은 축사에서 "오늘 이 자리가 있기까지 정부와 노무현 대통령 개인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컸고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사의를 표했다. 이에 앞서 노 대통령은 10월 27일 이병완 실장을 보내 김대중도서관에 후원금을 전달했다.
그러나 사저 방문의 직접적인 단초를 제공한 것은 10월 10일 북한 핵실험과 관련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한 오찬에서 DJ가 겪은 '수모'에 대한 노 대통령의 '죄송함'이었다.
노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식사를 함께 한 것은 지난 2004년 1월 이후 두 번째이다. 그때는 김대중·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 3인이 참석했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건강을 이유로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특별한 이유를 대지 않은 채 불참했다.
와인 세 병이 곁들인 이날 만찬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주도했다. 이날의 만찬 풍경은 이진씨가 지은 <참여정부, 절반의 비망록>에 잘 나타나 있다.
전두환 "전직 대통령으로서 체면 있게 사람대접 받은 건 DJ 때"
전 전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을 보며 말했다.
"난 옛날에 김대중 대통령과 사이가 나빴잖아요. 사귈 기회도 없었고, 근데 내가 형무소에 있을 때에요. 그때 교도관들의 90%가 호남사람들인데 나한테 그리 잘해줘요. 전직 대통령으로서 체면 있게 사람대접 받은 건 김 대통령 때였어요. 난 김 대통령이 그렇게 할줄 몰랐어요. 외국 갔다 오면 초대해서 설명도 해주시고 해서…"
말이 길어지려고 하자 이순자 여사가 눈치를 주었다.
"좀 잡수시면서 말씀하세요."
전 전 대통령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김 대통령 덕분에 중국에 가서도 대접을 무지 잘 받았어요. 김 대통령이 술을 못하시니까 마오타이를 사올 수도 없고. 그래서 그냥 덜렁덜렁 돌아왔는데 이 자리에서 정말 감사드려요. 뒤에서 그렇게 봐주셔서…." (중략)
환담이 계속 길어지자 김 전 대통령이 자리를 정리했다.
"바쁘신데 잘 먹었고, 건강하십시오."
노 대통령이 화답했다.
"이리 재미있는줄 알았으면 진작 모셨을텐데 말입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김영삼 정부 시절 2년 가까이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김대중 정부 들어 출감했다. 그가 '전직 대통령으로서 체면 있게 사람대접 받은 것 김 대통령 때였어요'라고 말한 것은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DJ는 당선자 시절 수감중인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당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에 5공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졌다. 이진씨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지난날들에 대한 회고와 덕담만으로도 전·현직 대통령들의 만남은 유의미했다'고 평가했다.
YS "내 정치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러운 것이 '무현이'를 국회의원 시킨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