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80회

등록 2006.11.27 08:23수정 2006.11.27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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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들끼리 처음으로 이어지던 대화가 풍철한의 빈정거림으로 끝났다. 함곡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언제나 저런 식이다. 다른 일에는 자신도 가끔 놀랄 정도로 속이 깊은 풍철한이 여자와 관계되면 저렇듯 아예 쪽박을 깨버리는 것이다. 오랜만에 말문을 연 동생을 위해서 자신이 대화를 이어나가야 했다.

"호의호식할지 윤석진처럼 죽을지 알 수 없는 일이지."


"갑자기 윤석진은 왜?"

물은 것은 풍철한이었지만 반효나 설중행의 얼굴에 나타난 기색을 보고는 말했다.

"윤석진은 사실 상만천의 사위라 할 수 있어. 금방 흐지부지 사라지기는 했지만 소문난 윤석진의 혼인 때 풍문이 돈 적이 있었네. 윤석진과 혼인한 여자는 이십대 중반이었지만 큰 기루를 다섯 채나 가지고 있었거든. 돈 많고 아름다운 여자지만 젊은 나이에 배경도 없이 어떻게 그리 큰 돈을 벌었는지, 또 어느 가문의 규수인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여자였단 말이네."

"그 여자가 상만천과 관계가 있었단 말인가?"

"쉬쉬하고는 있지만 그녀의 모친은 과거 유명한 기녀였다고 하네. 상만천이 젊었을 적 한 때 가까이했던 여자였다고 하더군. 딸일 가능성이 크단 말이네."


"그렇군요. 그래서 그토록 이른 새벽부터 상씨 자매가 윤석진의 죽은 모습을 확인하러 왔던 것이군요."

함곡이 자신을 바라보자 선화가 마지못해 맞장구를 쳤다. 오빠의 마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윤석진의 사건에 대해서는 상만천 쪽에서도 나서겠군."

풍철한의 말에 선화가 다시 그를 흘겨보더니 시선을 돌려 능효봉과 설중행을 보며 말했다.

"여태까지 숨기고 있었던 일을 윤석진이 죽은 다음에 굳이 알리려 할 만큼 상만천이 누구처럼 바보는 아니겠죠. 그래서 두 분이나 우리는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거예요."

"끄응…."

풍철한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선화의 말 중에서 '누구처럼'은 분명 자신을 빗댄 말이다. 졸지에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바보가 되었다.

"어쩌면 상만천은 오히려 우리를 이용하려 들지 몰라요. 은근히 우리에게 호감을 표시하고, 더군다나 딸들의 심중은 어느 정도 읽을 테니 잘된 일인지 모르죠. 우리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측근 누군가를 우리 일행에 집어넣으려 하겠죠."

"대상이야 용추뿐이 더 있겠나? 더구나 보주도 어제 도움을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으니 어색하지는 않겠지."

그때였다. 창밖으로 갑자기 빗줄기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쏴아아---- 타타닥----

날씨가 끄물거리더니 드디어 폭우를 쏟아지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서늘한 바람과 함께 빗방울이 부서지며 스며들었다.

"빌어먹을… 비 때문에 움직이기도 힘들겠군. 물에 빠진 쥐새끼 꼴을 하고 다녀야 하니 말이야."

"우장(雨裝)이나 빌려달라고 해야겠군."

"내가 이들과 같이 다니겠네. 자네는 반효와 같이 다니게."

풍철한은 말과 함께 반효를 쳐다보았다.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상만천을 만난다 하니 염려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상만천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반효는 반문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당연하다는 모습이었다.

"뭐…, 꼭 그럴 것까지야…."

풍철한의 생각을 모를 함곡이 아니었다. 사건의 단서라고 생각했던 윤석진마저 살해된 지금으로서는 함곡과 풍철한 일행이라고 안심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한 번은 은근히 거절하는 것이 반효의 위상을 높여주는 일이었다. 다시 말을 이으려 할 때 철벅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현무각 입구에서 물을 털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온 사람은 좌등이었다.

철퍽철퍽--- 타닥닥---

"원… 갑자기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다니…."

귀산노인의 거처를 나와 함곡 일행이 현무각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보 내의 일을 잠시 처리하겠다고 헤어졌다고 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우장 몇 벌 부탁하려 했었소."

물을 털어내기는 했어도 전신이 축축하게 젖어있는 모습이었다.

"그야 어렵지 않지만 나가실 참이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소. 시간이 갈수록 피가 마르는 기분이오."

풍철한의 엄살에 좌등은 한 쪽 의자에 몸을 실으며 말했다.

"알아보라고 한 것은 모두 다섯 명이오."

"……?"

좌등의 뜬금없는 말에 풍철한이 무슨 말이냐는 기색을 띄우자 좌등이 빙그레 웃었다.

"서향나무의 향 말이오. 천리향…!"

"아… 그것……?"

"사내는 아까 말씀드렸듯이 보주의 다섯 번째 제자인 미환검이 유일하고, 여자가 넷이오. 보주의 넷째 제자인 봉황검(鳳凰劍) 궁수유 소저 역시 사용하고 있소. 운중각의 시비인 운향(蕓香)이란 아이와 찬모(饌母)인 유하(柔?)란 여인이오. 그리고…."

궁수유의 몸에 천리향이 나는 것은 누구보다 설중행이 잘 알고 있다. 궁수유가 윤석진과 진가려를 살해한 것일까? 궁수유가 그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아도 비밀통로에서 천리향이 맡아지는 순간 궁수유를 떠올렸었다.

잠시 말을 끊고 망설이던 좌등이 다시 말을 이었다.

"보주의 따님인 우슬(于瑟) 소저도 다른 여러 가지 향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가끔 천리향을 사용한다고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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