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규의 자전거 '청구'와 김남희의 자전거 '백운(흰 구름)'김남희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의 첫 페이지를 기억하는가. 출발선 바닷가에 자전거의 뒷바퀴를 담그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던 홍은택 동지의 상기한 얼굴을! 우리의 자전거 여행은 당연히 자전거 혁명을 꿈꾸는 홍동지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린 자전거를 끌고 모슬포 바닷가로 내려갔다.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도로에서 모래사장으로 진입하는 턱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첫 추락이다. 다행히 이미 속도를 늦춘데다 도로변의 타이어로 만든 턱에 부딪혀 몸에 충격이 오지 않았다. 모래사장으로 자전거 끌고 내려갔다 오느라 기운 다 쓰고, 뒷바퀴만 바다에 담근 게 아니라 신발과 다리까지 다 물에 젖어버렸다. 기운 빠진 몸을 도로변에 주저앉히고 간식을 먹는데 이 남자가 중얼거린다. "앞바퀴는 어디다 담그지?"
용머리 해안으로 들어가는 삼거리 고갯길. 자전거에서 내려 자전거를 끌고 갔다. 치욕스럽지만 어쩌리. 지금 내 몸은 이 정도의 고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고개의 정상에서 물 구입. 한 병을 다 '원샷'해버렸다. 물병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세워놓은 자전거가 자꾸 굴러가며 쓰러진다. 벌써 다리를 들어올리기가 힘이 든다. 출발하려는 찰나, 빗방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제기랄.
시야가 흐려진다. 몸이 젖는 건 두렵지 않은데 도로가 젖는 게 무섭다. 속도를 떨어뜨리고 조심스레 달리는 데 도로변에서 귤을 파는 할머니가 말을 걸어온다.
"싣고 가수."
"그 무거운 걸 어떻게 싣고 가요?"
"쉬어 가라고!"
"아, 네."
자전거를 세우고 할머니에게 갔다. 할머니는 내 주먹만한 귤 몇 개를 손에 쥐어주신다.
"이거 까먹으면서 쉬어. 낭(나무)에서 금방 딴 거라 맛있수다. 에구, 여름에 자전거를 타야지, 무사(왜) 겨울에 탐수광?"
"글쎄 말이에요, 왜 이러고 있는지 저희도 모르겠어요."
라이트도 없이, 1시간의 야간주행을 하다
귤밭에 들어가 사진도 찍으며 놀다가 생각난 김에 귤 한 상자를 사서 <오마이뉴스>로 보냈다. 제주의 바닷바람에 익은 오렌지색 귤이 삭막한 도시의 사무실에 향기를 전하기 바라며. 할머니는 귤 상자 맨 위에 초록잎들이 붙은 가지를 담아주신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가다가 먹으라며 귤 한 봉지를 건네주신다.
"이걸 어디에 매달고 가지?"
귤 봉지를 돌돌 말아 손목에 매단 이 남자, 이런다.
"시골에선 다 이렇게 다녀."
"우린 라이더야!"
"라이더는 개뿔."
그나마 없던 스타일이 확 구겨지는 순간이다.
화순삼거리 고갯길에서 다시 쉬었다. 그래도 자전거를 끌지 않고 타고 고개를 넘었다. 야트막한 고개에도 내 몸은 가파른 비명을 질러댄다. 게다가 제주도, 길이 이상하다. 오르막은 끝없이 길기만 한데, 내리막은 턱없이 짧거나 아예 없다.
중문에서 휴식도 취할 겸 테디베어박물관과 여미지식물원에 들렀다.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제주는 역시 관광도시다. 주차장의 차들이 전부 렌트카임을 말하는 '허' 번호판이다.
자전거를 끌고 오는 사람은 우리뿐이다. 잘 빠진 자동차들 곁에 서 있는 두 대의 자전거가 성대한 결혼피로연이 끝나고 혼자 돌아가는 처녀의 뒷모습처럼 쓸쓸해 보인다. 전국의 라이더들이여, 어디에 있단 말인가.
중문에서 서귀포로 향하는 길목의 고갯마루에서 네 번 쉬고, 세 번 자전거를 끌고 넘었다. 그 사이 해가 졌다. 라이트도 야광조끼도 없이 야간주행을 한 시간이나 했다. 버스가 30cm 옆으로 스쳐가는 아찔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내 몸은 여전히 2차선 도로에서 앞뒤로 차가 지나칠 때면 긴장하고, 몸이 긴장할 때면 자전거도 덩달아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오늘은 무임승차, 하지만 내일 다시 자전거에 오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