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할머니의 능청스러운 수다

할머니 방송 작가가 쓴 베스트셀러 <당신, 내 말 듣고 있어요?>

등록 2006.11.29 10:09수정 2006.11.29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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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책 <당신, 내 말 듣고 있어요?>

책 <당신, 내 말 듣고 있어요?> ⓒ 푸른길

프랑스에서만 50만 부나 팔렸다는 책 <당신, 내 말 듣고 있어요?>는 한국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래서인지 책 표지나 편집이 약간 촌스럽다. 그러나 겉보기와 매우 다른 프랑스식 유머를 재미있게 풀어 놓아 아주 유쾌한 책이다.

저자인 니콜 할머니는 1960년대 프랑스 주부들을 사로잡았던 텔레비전 시리즈의 작가이자 영화감독이었다고 한다. 그녀가 오십이 넘은 나이에 늘어놓는 '할머니 수다'는 지루하지 않으면서 적나라하게 인간들의 삶을 묘사하여 통쾌하다. 주인공을 2인칭인 '당신'으로 지칭해 처음엔 어색한 느낌이 들지만, 읽다 보면 오히려 그녀의 삶에 동화되는 기분이 든다.


뚱뚱해진 몸매로 고민하는 당신, 이혼이나 바람피우기 등으로 골치를 썩이는 딸들, 신세대답게 놀라운 사고로 할머니를 놀라게 하는 손자들, "사랑해"라는 말 한 마디 안하고 삼십 년이 넘도록 같이 살아온 남편 등 그녀의 주변에는 풍부한 이야깃거리가 가득하다.

1부의 시작은 "바닷가에 널려 있는 조개껍질만큼 모든 나이마다 무수한 사랑이 있다"는 흥미로운 타이틀로 출발한다. 첫 번째로 나오는 이야기는 바람둥이 막내딸의 연애담이다.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브라질 댄서와 사랑에 빠져 남자친구를 버리고 엄마 집으로 피신 오는 알리제. 그녀를 찾아 들이닥친 브라질 댄서는 엄마의 존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딸과 애정 행각을 벌인다.

다행스럽게도 이 둘의 사랑은 양가 부모의 결사적인 반대와 새로 등장한 딸의 남자 덕분에 금방 끝나고 만다. 바람둥이 딸을 질책하는 엄마에게 "엄만 아빠밖에 모르지, 그걸로 충분하잖아!"라고 핀잔을 주는 알리제. 하지만 입을 꼭 다문 엄마에게도 스웨덴 빵집 주인과 에스파냐 투우사, 돈 많고 지루한 사업가, 또는 감옥에 들어간 정치가의 아내가 될 뻔했던 과거가 있다.

오십이 넘도록 콘돔을 한 번도 사용해 보지 않았던 그녀는 막내딸이 얘기하는 콘돔 이야기에 솔깃하다. 약국에서만 파는 줄 알았던 그 물건이 자판기에서도 나오고 슈퍼에도 있다는 얘기에 얼른 슈퍼로 달려가는 주인공. 금색, 야광색, 바나나 맛, 딸기 맛 등 생김새와 색깔, 맛까지 각양각색이라는 말에 그녀는 "살면서 이렇게 모르고 그냥 지는 것이 많다니!"라는 독백을 던진다.

능청스럽고 엽기적이기까지 한 이 할머니의 수다는 점점 재미있다. 일상생활을 그대로 옮겨오면서 그 모습들을 눈앞에 펼쳐지듯 묘사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할까. 거기다가 인생살이의 우여곡절을 재치 있는 문체로 해학적으로 표현하니 더더욱 웃음이 난다. 재미있는 코믹 영화나 드라마를 시리즈로 보는 느낌이다.


"할머니의 은밀한 즐거움은 어렸을 때 그리도 속을 썩이던 딸이 이젠 자기 차례가 되어 사춘기를 맞은 딸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는 것을 보는 것이다. 가장 달콤한 순간은 딸애가 당신의 어깨에 기대어 자기 딸의 변덕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들을 때이다.
'내가 걔 때문에 미쳐!'
'괜찮아, 너도 그 나이 땐 나를 미치게 했다니까.'
'내가?! … 걔에 비하면 나는 성녀 테레사였어.'
'좋아하네, 악마였지.'
딸애는 당신 말을 믿지 않는다. 다 잊어버린 것이다."


손자들을 몇이나 본 늙은 할머니이지만 그래도 젊은 정신과 마음을 갖고 있기에 이런 유머가 나오지 않을까?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명품을 좋아하며 질투의 화신이고 자신의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어 한다. 이 단순한 진리를 남자들은 왜 모를까? 주인공은 이처럼 여성의 시각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는다.


책을 읽다 보면 이 할머니의 성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 자식 흉보기, 남편 욕하기, 친구들 흠잡기 등에 놀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정적 묘사가 넘쳐나는데도 즐거운 마음이 드는 건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유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의 텔레비전 취향을 보고 '이십 명이나 되는 남자들이 공 하나를 보고 쫓아다니는' 프로그램을 본다고 욕하면서도 그를 위해 따뜻한 차를 한 잔 만들 수 있는 여자, 삼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음에도 들지 않는 자동차 선물을 받으면서도 남편의 선물이기에 고마워할 줄 아는 여자. 이런 여자라면 오십이 넘고 뚱뚱한 몸매일지라도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책에는 행복이 넘친다. 온갖 해프닝과 삼십 명이 넘는 가족들이 벌이는 사고들로 가득한 집안이지만 그 속에 사는 재미가 있다. 사고뭉치 가족들이 때로는 미워하고 또 때로는 사랑하면서 멋진 인생을 펼치는 이야기. 그런 모습들을 잘 그려낸 작가의 뛰어난 언어 감각이 놀라울 따름이다.

책의 번역자는 실제 이 작가를 만나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엄청나게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인데도 책의 주인공처럼 시골에서 순박하고 재미난 삶을 꾸려가는 작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데, 나도 그녀를 만나고 싶다. 이 할머니를 만나서 수다를 떨다 보면 왠지 내가 겪는 온갖 힘든 일들도 하나의 해프닝으로 여길 만큼 여유로운 마음이 생길 것 같기 때문이다.

당신, 내 말 듣고 있어요?

니콜 드뷔롱 지음, 박경혜 옮김,
푸른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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