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천사 석탑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임금님

[태종 이방원 2] 신생국 조선임금 이성계의 고민

등록 2006.11.29 19:25수정 2006.12.0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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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풍득수의 천하명당 개경

송악산은 개경의 상징이다. 신령한 산이라 하여 일명 숭산(崧山)과 신숭(神崇)이라 불리는 송악산은 백두산에 맞닿아 있다.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오던 백두산의 정기가 마식령산맥을 넘으며 성거산과 정분을 나누다 천마산을 낳고 오관산을 품어 송악을 낳으니 이곳이 개경이다.

한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펴서 좌청룡 부흥산과 우백호 오공산을 감싸 안고 용수산을 바라보며 오천(烏川)과 백천(白川)을 얻었으니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장풍득수(藏風得水) 형국이다. 장풍득수란 물을 얻어 바람을 잘 갈무리한다는 뜻이니 천하의 명당이다.

이렇게 좋은 터에 자리 잡은 개경이 손안에 든 바람을 잘 관리하지 못하여 바람을 맞아 바람 잘 날 없으니 지력의 쇠함일까? 외성(나성)과 내성, 그리고 황성과 궁성 등 4중 성곽으로 둘러싸인 요새가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니 하늘의 기운이 다함일까?

개경이 바람을 맞아도 큰 바람을 맞았다. 보통 바람이 아니라 대형 태풍급 바람이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개국하고 475년 동안 면면이 이어져 내려오던 왕(王)씨 왕조가 무너졌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바람을 맞아도 원상회복이 어려운데 천지조화를 받은 바람을 맞았으니 개경은 망가지는 일만 남았다.

수창궁에 들어앉은 이성계는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정도전이 신생국을 설계하고 왕자와 개국공신 그리고 그 자제들이 왕륜동에 모여 충성을 맹세해도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려 유민과 고려에 충성하는 유생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사라진 고려 왕조에 연민의 정을 보내고 있는 백성들의 질시의 눈초리가 따가웠다.

모반 사건에 연루된 이첨을 합포로 귀양 보내고 반 혁명사건 관련자 왕화, 왕거, 김가행을 참수형에 처하자 개경 백성들의 저항이 더욱 거칠어졌다. 예정된 수순대로 공양군 삼부자를 삼척으로 유배 보낸 후 교살시키자 개경이 들끓었다. 돌파구는 있었다. 천도다. 도읍지를 옮기는 것이다. 고려의 사직과 종묘가 있는 개경을 이성계는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백성들의 눈초리가 따갑다, 개경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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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86호 경천사 10층 석탑. 구한말 일본인 다나까 미쓰아끼가 불법 해체하여 일본으로 밀반출하였다가 반환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 세워져 있다. ⓒ 이정근

한양과 계룡산을 후보지에 올려놓고 검토하면서 고려에 충성하는 유생들을 흔들어 놓기 위하여 과거시험을 치렀다. 새 왕조가 마음을 열고 포용하는 의미에서 자격조건을 대폭 낮췄다. 초시를 생략하고 복시와 전시로 직행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고려 유생들이 과거시험 자체를 거부하고 두문동으로 들어 가버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겼다.

피 묻은 손을 씻기 위하여 이성계는 사찰을 자주 찾았다. 현비 강씨는 잠저시절부터 자주 찾던 집근처 연복사를 좋아했지만 이성계는 경천사를 즐겨 찾았다. 현비는 연복사에 5층 석탑을 시주 공양하며 자신이 낳은 방번과 방석의 무병장수를 빌었지만 이성계는 경천사를 찾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머리를 식히고 자기 충전시간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론 병을 핑계 삼아 한동안 기거하기도 했으며 수창궁으로 출퇴근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천사 경내에 들어서기만 하면 왠지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대웅전 앞에 우뚝 솟아있는 10층 석탑을 바라보노라면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만들 수 있는 인간의 위대함과 그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의 모습이 어쩜 오늘의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경천사 경내를 산책하던 이성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0층 석탑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듯이 자신을 억누르는 중압감은 명나라였다. 이성계에게 있어서 명나라는 넘을 수 없는 태산이었다. 요동을 정벌하고 여진족을 쳐부수며 지리산에 침투한 왜구를 소탕하던 장수는 한낱 조선의 무장일 뿐이었다.

이성계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조선에게 명나라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하늘이었으며 천자가 있는 황제의 나라였다. 거역할 수 없는 대국이었다. 이러한 명나라에서 호출령이 떨어진 것이다. '네가 우러러 본다는 황제에게 그 따위 하급 관리를 사신으로 보내지 말고 너의 장남이나 차남을 보내라'는 것이다.

명나라에 들어간 사은사 이염을 황제가 직접 매질하여 초죽음이 되어 보내고, 그래도 잘못했다고 황태자의 생신축하를 빌미삼아 사죄하러 들어가려는 조선의 천추절 사신을 요동에서 요동도사가 황제의 명이라며 아예 돌려보내는 명나라의 행태는 도를 벗어났다. 행패에 가까운 명나라의 태도는 조선에게 굴욕을 요구했다.

약소국 조선을 업신여기는 명나라의 행패는 도를 넘어가고

학자는 논한다. "고비사막을 넘나들며 원나라와 격전을 치르느라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명나라를 상대로 원나라와 연합하여 요동을 정벌했으면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고.

학자는 논한다. "오진도에 따른 군사연습은 전술일 뿐, 대명 전쟁에 대한 전략과 전쟁계획이 조선에게 있었느냐?"고.

명나라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왕자를 보내라는 것은 구실에 불과했다. 요동정벌을 주장하는 정도전에게 표적이 맞춰져 있었다. 그들은 정도전을 동이화원(東夷禍源)이라 지목해두고 있었다. 즉 정도전이 조선문제의 화의근원이고 걸림돌 이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명나라는 한족 특유의 근성대로 드러내놓고 요구하지 않았다. 변죽으로 조선을 압박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알아서 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속셈을 알고 있는 이성계는 혁명동지 정도전을 사지에 보낼 수 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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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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