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보신탕집 아들이라 좀 다르군"

[어색한 남녀의 제주도 자전거 여행 ③] 트럭 운전기사의 관용으로 간신히 살아나다?

등록 2006.11.30 14:31수정 2006.12.01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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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미항. 김남희와 박상규의 그림자.
위미항. 김남희와 박상규의 그림자.김남희
[이 여자 김남희] "우리 이미 죽은 거야?"

이럴 줄 알았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다. 내 마음은 다시 라이더로 복귀했는데 내 몸은 문지방 넘을 힘도 없는 노인이다.


끙끙거리며 페달을 밟는 나를 본 이 남자, 아직 몸이 안 풀려서 그런 거라고 말한다. 내 몸은 내가 안다. 이건 안 풀려서가 아니라 너무 풀려버린 탓이다. 내 말을 듣지 않는, 기운을 쓰지 못하는 이 다리로 다시 자전거를 타야 하다니!

다행히 약간의 오르막을 거치고 나니 긴 내리막이 이어진다. 바람을 가르며 내리막을 미끄러져 내려오니 첫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서귀포 시내로 진입하기 위해 왕복 3차선 도로에서 좌회전을 해 12번 도로로 진입하는 고난도의 테스트다. 넓은 도로에서의 첫 좌회전이라 몸이 굳어오고 있다.

"선배, 차 와. 오른쪽으로 붙어요."
"응? 뭐라고?"


그때 난 이미 좌회전을 위해 1차선 쪽으로 자전거를 튼 상태였다.

"안 들려! 뭐라 그런 거야?"
"오른쪽으로 붙으라니까!"



이 남자의 목소리가 다급해지고 높아진다. 내 몸이 다시 통제 불능 상태로 접어들고 말았다. 몸과 마음이 반대로 노는 경지다. 머릿속으로는 오른쪽인데 자전거는 왼쪽으로 가고 있다. 요란스러운 빵빵거림이 들려온다. 결국 비틀거리는 자전거를 끌고 도로 한 가운데 서 버렸다. 운전자가 창문을 열고 내게 뭐라고 외친다. 돌아보니 거대한 트럭이다. 길을 건너온 이 남자가 말한다.

"선배, 그거 알아? 우린 이미 죽은 거야."
"근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그거야 저 운전자의 엄청난 관용과 양보 정신 때문이지."



휴, 죽을 뻔 했다. 도대체 서울에서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 긴장 상태를 견뎌내는 걸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신례리를 향해 달려가는 길. 이 남자가 외친다.

"앗, 라이더다."
"진짜? 어디?"
"저기 왼쪽 길 건너편."



그동안 얼마나 찾았던 동료 라이더인가. 반가움에 고개를 한껏 빼고 두리번거린다. 왼쪽이라고? 짐자전거를 끌고 힘겹게 오르막을 오르고 계신 동네 할아버지다.

"야, 너 죽을래?"
"왜? 진정한 라이더잖아."


그래, 어쩌면 저분들이야말로 이 남자의 말처럼 운동과 일, 삶과 여가가 일치된 경지의 진정한 라이더인지도 모른다.

'라이더의 가장 위험한 적' 개떼들을 만나다

초가집 마당에서.
초가집 마당에서.김남희
신례1리로 가기 위해 좌회전을 받아 골목으로 들어선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싶었더니 튀어나온 개들이 내 자전거를 둘러싸고 사납게 짖어대기 시작한다.

"야, 어떡해? 이게 바로 홍 선배가 말한 '라이더의 가장 위험한 적' 개떼들인 거지?"
"얘들은 쪼만하잖아. 그냥 겁주면 돼요."


과연, 보신탕집 아들답다. 개들이 꼬리를 내리고 돌아선다.

개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용기백배한 우리가 지금 향하는 곳은 오마이뉴스 독자의 집. 제주도 여행에 대한 얘기를 들은 이 친절한 독자. 제주 곳곳의 관광지에 대한 꼼꼼한 메모를 곁들인 책을 내가 자주 가는 인사동의 주점에 맡겨 놓았다. 그리고 부모님께 말씀 드렸으니 집에 들렀다 가라는 말도 덧붙였다.

부모님의 집이 문화재로 지정된 초가집이라는 말에 혹해 자전거를 끌고 이 끝없는 오르막길을 오르는 우리. 그 사이 계속 전화를 걸어오시던 아버님이 골목 어귀에 나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계신다. 어머님, 아버님께 인사를 드리고 옥돔구이와 삼겹살, 토장국으로 점심을 달게 먹었다.

그리고 80년 된 초가집을 둘러봤다. 안채와 사랑채, 창고와 외양간으로 쓰인 건물까지 세 채의 초가집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디귿자로 서 있다. 예쁘다. 감탄이 절로 나는, 제대로 잘 지어진 집이다. 이 집 안채 마루에는 아버님의 할아버지 회갑잔치 사진이 걸려있다. 60년의 세월이 흐른 2003년 가을, 바로 이 마당에서 할아버지의 증손자가 결혼식을 올렸다. 해마다 겨울이면 새로 엮은 이엉을 얹은 이 초가집이 그 모든 일들을 지켜봤다.

이 어여쁜 집에서 나고 자란 그녀가 부러워진다. 옆으로는 귤밭이, 뒤로는 키 큰 후박나무와 동백나무들이 자연스런 울타리를 만든 이 집에서 그녀는 아침이면 동박새 울음소리에 잠이 깨었겠지. 어린 그녀가 뒤뜰로 통하는 문을 열어놓고 낮잠에라도 들 때면 귤밭을 넘어온 바람이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지고 지나갔겠지. 초가집을 나오는 길, 어머님이 손수 만드신 귤차와 귤잼, 귤 한 봉지를 가득 담아 주신다.

라이더 체험 이틀째, 내 몸은 진화하고 있다

제주도 전통 초가집으로 들어가는 길
제주도 전통 초가집으로 들어가는 길김남희
배가 부르고 나니 다리에도 힘이 좀 생긴 것 같다. 한참 달리고 있는데 다시 이 남자가 소리 지른다.

"어, 스톱! 스톱!"

자전거를 세우고 보니 내 가방이 도로에 내팽개쳐져 있다. 짐칸의 끈조차 제대로 묶지 못해 가방을 떨어뜨리다니. 뒤에서 오는 이 남자가 없었으면 그것도 모르고 가볍게 달려갈 뻔 했다.

"이제부터 가방은 내가 묶어 줄게요."

이 남자, 따뜻한 천성을 타고났는지 매사에 마음씀씀이가 감동이다. 어제부터 이 남자는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겁 많고 소심한 나를 위해 남다른 배려를 발휘한다. 이 남자는 자전거를 탈 때도 언제나 이렇게 외친다.

"내가 뒤에서 차를 볼 테니 걱정 말고 달려요."
"선배 차 온다. 오른쪽으로 붙어요."
"이제 좌회전해요."
"차 안 오니까 지금 그냥 가면 돼요."


그는 내가 불안해하지 않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뒤에서 따라오며 내 눈과 귀가 되어준다. 나는 그가 뒤에서 외치는 대로 자전거를 틀고, 세우고, 몬다. 혼자였다면 자전거 일주를 시도조차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적당한 가격의 숙박시설을 찾지 못한 우리, 어둠이 내린 도로를 달리고 있다. 해안도로로 내려선다. 저녁 어스름이 깔린 도로에는 억새가 패었고, 그 뒤로 바다가 뒤척이고 있다. 가로등도 없는 길. 바람을 가르며 인적 없는 도로를 달려가는 기분이 상쾌하다. 수평선 너머로 지나가던 저녁해가 몸을 기울여 우리를 바라본다. 다시 밤이 내린다. 바람이 거세진다.

라이더 체험 이틀째. 내 몸은 진화하고 있다.

제주도 위미항 풍경
제주도 위미항 풍경김남희


[이 남자 박상규] "어디서 자냐고?"

낯설고 어색한 여자와 이틀을 보냈고 3일째 밤을 맞이하고 있다. 이쯤 되면 공개할 건 공개하고 밝힐 건 투명하게 드러내는 게 좋다. 내가 묻고 내가 답하는 형식으로 이 여행의 몇 가지를 정리해 봤다.

- 잠은 어디서 어떻게 자고 있나.
"역시 가장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민박집에서 잔다.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 우린 딱 1번 만났다. 그 때 어디서 어떻게 잠을 자자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지 못했다. 가장 싼 곳에 머물자고 합의했을 뿐이다. 난 무지 궁금했다. 가장 싼 방 하나를 구하자는 뜻인지, 아니면 두 개를 잡자는 말인지. 소심한 나는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닥치면 알아서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다. 첫날은 김남희씨 독자의 소개로 한 민가에서 잤다. 어제(6일)는 민박을 했고, 오늘은 게스트하우스에서 방 하나를 잡았다. 한 사람은 침대에서 자고, 다른 한 명은 바닥에서 잔다. 어색할 일도, 썰렁할 일도 없다."

- 당황했던 순간은?
"어제 발생했다. 매일 목욕할 때 빨래를 한다. 물론 속옷도 빤다. 그런데 뻔한 공간에서 속옷을 어떻게 말려야 할 지 좀 난감했다. 그냥 김남희에게 양해를 구하고 방 건조대에 널자고 작정했다. 욕실을 나와 빨래 건조대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녀의 속옷이 먼저 건조대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냥 '과감하게' 그녀의 속옷 옆에 쫙 펴서 널었다."

김남희와 나, 고등어조림과 갈치구이를 먹을 수 있을까?

억새밭에 선 김남희
억새밭에 선 김남희박상규
- 회비는 얼마?
"김남희도 그렇지만 나도 가난하다. 우린 여행 경비를 최소한으로 잡았다. 아침은 과자나 빵으로 해결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저녁은 민박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있다.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는 건 좀 비참하다."

- 뭐 가지고 여행하지?
"각자 노트북과 디지털 카메라를 가지고 왔다. 또한 책 한권씩을 가지고 왔다. 나는 장정일의 <공부>, 김남희는 김규항의 <나는 왜 불온한가>. 간식이 두 봉지 있는데, 무게가 상당하다. 이게 옷가지 등을 제외한 우리들 짐 전부다."

- 가장 힘든 때는?
"하루 자전거 타기를 끝낸 후 방에 앉아 서로의 노트북을 이용해 기사 쓸 때. 글쓰기는 언제나 어렵고, 매일매일 여행기를 쓴다는 건 적지 않은 부담이다. 게다가 여행 3일째가 될 때까지 우린 아직 술을 마셔보지 못했다. 이렇게 까지 어려울 줄 알았다면, 매일 쓰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것도 여행의 한 부분이라 여기며 최대한 즐기려 노력하고 있다."

- 둘이 합의한 여행의 원칙은?
"첫째, 회비는 각자 공평하게 부담한다. 둘째, 여행은 자전거와 도보만을 이용한다. 셋째, 각자 가져온 책은 다 읽고 교환해서 또 읽는다. 이 외에 김남희와 '이면계약'을 체결한 게 있다.

모든 식사는 '김남희 식'으로 한다에 이어 또 다른 하나를 공개하면 이렇다. '나는(김남희) 너를(박상규)를 버릴 수 있지만, 너는 나를 버릴 수 없다.' 다소 과격해 보이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여행은 자유로운 일상이고, 뜻이 맞지 않으면 언제든 서로 다른 길을 갈 수 있다. 그런 상황을 재밌게 표현한 것이다(이렇게까지 설명했는데, 왜 이렇게 구차하지?)."

- 뭐 먹고 사나.
"여행을 오기 전 고등어조림과 갈치구이를 꼭 먹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직 먹지 못했다. 3일째가 됐지만 아직 한 끼의 밥도 사먹지 않았다. 아침은 간단하게 때우고 점심은 지금까지 그냥 넘기거나 얻어먹었다. 오늘 저녁은 라면을 사왔고, 어제는 민박집 아주머니가 맛있는 밥을 공짜로 주셨다. 우리가 과연 고등어조림과 갈치구이를 먹을 수 있을지, 김남희와 나는 지금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귤은 이보다 많이 먹을 수 없다."

- 앞으로의 여정에서 김남희에게 바라는 점은?
"잘 끝낼 것이란 믿음이 있다. 진부한 대답이지만 서로 지금처럼만 하면 다툴 일도 없을 것 같다."

바닷가 억새 물결.
바닷가 억새 물결.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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