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84회

등록 2006.12.01 08:10수정 2006.12.01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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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보주를 포함해 여기에 있는 두 사람 외에 누군가가 더 왔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것도 철담과 매우 친한 사람이. 이제 보주만 확인하면 철담의 서탁에 놓여있던 찻잔의 주인이 명백해질 것이다.

"오후에 오신 손님은 세 분이었는데 마주 놓여있는 찻잔이 하나뿐이라 여쭈어본 것뿐입니다. 그날 나누신 말씀 중 특별한 것이라도 있으신…"


함곡의 질문이 끝나기 전이었다. 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르신… 창월(蒼月)입니다. 운중선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되었나? 비가 쏟아지니 시각을 알 수 없구먼."

성곤은 잠시 창밖을 보다 함곡에게 시선을 돌렸다.

"언제든 찾아오게나. 지금은 친구를 마중 나가야겠네."


말과 함께 성곤이 몸을 일으키자 회운사태와 함곡일행은 어쩔 수 없이 따라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사실 더 물을게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곤이 문을 열고 나서자 문 앞에는 삽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금방 밭일을 마치고 온 농부처럼 베옷을 입고 갈대 잎으로 만든 초의(草衣)를 우장 대신에 걸쳤는데 성곤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자신이 걸친 볼품없는 초의를 한 벌 더 들고 있었는데 아마 성곤의 비옷 대용으로 들고 있었던 것 같았다.


'창월…, 푸른 달이라…. 모습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군.'

함곡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침에 귀산노인이 보여준 인명부의 일부를 기억해 냈다. 동정오우와 관련된 인물이라면 노치지 않기 위해 유심히 보았던 덕이었다.

- 창월(蒼月).
운남(云南) 출신. 운중보 창설 당시 열두 살의 나이로 가정(家丁)으로 들어왔다가 성곤의 눈에 띄어 면천(免賤)을 하였고, 그 뒤 성곤으로부터 문무를 사사(師事) 받음. 정식 사제지연(師弟之緣)은 맺지 않았으나 성곤의 수발제자로 인정받고 있음. 성곤의 거처라 할 수 있는 주작각(朱雀閣)을 떠나지 않는 인물. 과묵한 편이며 다른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으로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음.

'이십육 년 동안 성곤에게 사사받았다면 적어도 일류고수를 능가할 정도는 되겠군.'

아마 운중보를 나선다면 무림에서 나름대로 고수란 소리를 들을 정도는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가끔 들르는 성곤의 수발이나 들기 위해 주작각에 칩거하고 있다는 것도 보통사람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함곡은 그런 생각이 미치자 사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리깔고 있던 청년의 눈을 보는 순간 창월이란 이름이 어쩌면 그에게 잘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청년의 눈은 이상하게도 서역인이나 색목인처럼 벽안(碧眼)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 모습에서도 전형적인 중원인과는 약간 달라 혼혈인 듯싶었다. 피부가 검은 관계로 미처 알아보지 못한 탓이었다.

성곤을 모시는 창월이란 사내의 태도는 매우 공손했다. 부모나 사부를 대하는 태도 이상이었다. 감히 성곤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죄가 된다는 듯 창월의 시선은 언제나 성곤의 발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매우 흥미로운 사람이군.'

발걸음을 옮기며 함곡은 창월이란 사내의 넓은 등 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차피 배가 들어온다면 만나려 예정했던 잠룡검 장문위 역시 마중을 나갈 터여서 그의 거처로 간다 해도 헛걸음칠 공산이 컸다. 그것은 풍철한 일행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일단 들어오는 인물들부터 지켜보는 것이 순서겠군.'

그는 거처인 현무각으로 향하지 않고 배에서 내리는 인물들을 볼 수 있는 백팔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풍철한 역시 자신과 같은 입장일 것이라 생각했고, 더구나 중원사괴 중 막내인 혈녹접(血綠蝶) 소유향(蘇有香)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느니 만큼 들어오는 인물들을 확인하려 할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가지 않아 멀리 풍철한이 일행과 같이 면철비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46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 붓던 빗줄기가 어느덧 가늘어지며 하나의 관(棺)이 맨 먼저 내려왔다. 살아있어도 제일 먼저 내려올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죽어 시신으로 운중보에 들어오고 있었다. 한 때 자줏빛 붉은 낚싯대 하나로 세상을 호령하던 인물이 관에 누운 채 친구의 거처를 찾아들었다.

사실 정상적인 상례(喪禮)라면 만장(輓章)을 들고 보상(報喪:부고-訃告)을 해야 함이 마땅한 일. 소렴(小殮-몸을 씻기고 수의를 갈아입히는 일)의 절차를 거쳐 대렴(大斂)의 의식으로 입관(入棺)을 시켜야 함에도 죽은 모습 그대로 입관을 시켰으니 가까운 친지들은 애가 끓고, 아무런 관련 없는 이라 할지라도 혀를 찬다.

살아생전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누렸다 하나 그 끝은 객사(客死)라. 그것이 어쩌면 무림인이 되는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일지 모른다. 사십 전후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인물이 운중보주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한 후 닫혀있던 관을 슬쩍 열어 보인다.

친구다. 언제나 사리분별이 명확하고 친구라 하더라도 그 즉시 잘못을 지적하던 친구다. 매사 빈틈이 없고 악을 증오해 절대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던 친구다. 혈간을 휘두르면 사방 오장 이내에는 아무도 다가올 수 없다던 바로 그 친구다.

무엇이 그를 놀라게 했을까? 밀랍처럼 변한 피부색에 놀라 부릅뜬 저 표정은 또 무엇인가? 검으로도 자르지 못한다는 애병 혈간은 왜 저리 부러져 삐쭉이 속살을 내보이고 있는가?

언뜻 운중보주의 눈가에 뿌옇게 물기가 스미는 듯싶었다. 그것이 지금 내리는 폭우 때문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표정도 애매했다. 눈 주위가 일그러진 채 분노를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옆에 서 있던 성곤이 그의 어깨를 감싸 안지 않았다면 언제고 그렇게 있을 터였다.

"단각주(亶閣主)가 수고했군."

관을 열어 보인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에게 말하자 사내가 황급히 보주를 향해 깊게 허리를 꺾었다.

"별 말씀을…. 제대로 주인을 보필하지 못한 비복(婢僕)으로서는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단혁(亶爀). 바로 철기문의 구천각(九天閣) 각주로 옥씨 형제들에겐 수족과 같은 존재다. 혈간 옥청천이 직접 문무를 가르쳐 철기문의 기둥으로 만들고 실제로도 혈간의 유일한 제자라 할 만한 인물이 바로 그다. 그럼에도 단혁 스스로는 옥씨가문의 가정(家丁)임을 부인하지 않았고 오히려 언제나 스스로 비복이라 낮춘다.

"누가 누굴 탓하겠나?"

"하오나 이 천한 목숨을 걸고 반드시 흉수들을 밝혀낼 것입니다. 몇 명이 작당해서 주인어른을 시해했을 리는 만무. 분명 그 배후에서 음모를 꾀한 작자들을 밝혀낼 것입니다. 이미 꼬리는 잡은 터…! 아마 곧 밝혀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의식적인지 모르지만 단혁은 자신의 왼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단혁의 수하로 보이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있었고, 그 중 수하 네 명이 피곤죽이 되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아볼 수 없는 두 명의 인물들의 양팔을 붙잡고 있었다. 바로 단혁이 말한 꼬리가 저들일 것이다.

"더구나 문주께서도 직접 나서신 상황입니다."

운중보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청문(淸文)까지…? 마땅히 그래야겠지. 본 보에서도 역시 전력을 기울여 흉수들을 잡아낼 것이야…."

그 순간 보주의 뒤에 서 있던 옥청량의 눈썹이 약간 일그러지는 것을 본 단혁은 아차 싶었다. 불쑥 솟구치는 노기에 목숨을 걸고 감히 흉수들을 반드시 색출해 내겠다고는 했지만 분명 주제넘은 말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옥청천을 부모와 같은 존재요, 사부라 생각해도 그 슬픔은 동정오우라는 막역한 친구들에게는 비할 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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