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의 헬렌켈러가 되고 싶어요!"

시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조영찬씨의 하늘색 꿈

등록 2006.12.07 11:15수정 2006.12.0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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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시청각장애인 조영찬(36)씨.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그는 지금 배우고 싶은 열망이 가득합니다.

시청각장애인 조영찬(36)씨.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그는 지금 배우고 싶은 열망이 가득합니다. ⓒ 국은정

과연 우리 한국에서도 헬렌켈러와 같은 인물이 나오는 것이 가능할까?

헬렌켈러처럼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중복장애(시청각장애)를 가진 조영찬(36)씨와 그의 아내 김순호 (44·척추장애인)씨에게는 요즘 커다란 고민 하나가 생겼다.

@BRI@바로 얼마 전 조씨가 오랜 숙원이던 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정식으로 통계가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조씨의 대학 합격은 시청각 장애인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들 부부는 정부에서 나오는 생계보조금만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는 탓에 300만원을 웃도는 등록금과 100만원 상당의 기숙사비를 감당하기에는 경제적인 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씨 부부의 형편을 아는 지인들은 백방으로 조씨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 보기 위해 뛰고 있지만, 그조차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한다.

이대로 등록기간을 넘기게 될 경우 조씨는 십수 년 만에 이루어진 대학 입학의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를 안타까운 상황에 처해 있다. 아내는 남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했다.

a 손가락 점자, 흔히 '점화'라고 부르는 시청각장애인의 새로운 소통방식. 김건형(46·시청각장애인)씨와 조영찬씨의 점화수업 장면입니다. 아름다운 소통의 모습입니다.

손가락 점자, 흔히 '점화'라고 부르는 시청각장애인의 새로운 소통방식. 김건형(46·시청각장애인)씨와 조영찬씨의 점화수업 장면입니다. 아름다운 소통의 모습입니다. ⓒ 국은정

"시력과 청력도 없는데 공부해서 뭐하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하지만 우리 남편은 손에서 점자책을 놓은 날이 없어요. 오히려 점자책이 없어서 못 읽을 지경이죠. 성경도 10번이나 읽었는걸요.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속이 새까맣게 탔어요. 남들은 공부하기 싫어서 엄살을 피우지만, 우리 남편은 그저 배우고 싶은 거, 오직 그거 하나인데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요. 제가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할 뿐이에요."


미국이나 일본처럼 (미국이나 일본은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통계가 정확하다고 함) 시청각 중복 장애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사실 조씨가 꿈꾸는 배움에 대한 꿈은 어쩌면 정말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씨는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 시련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점자정보단말기)를 이용하여 직접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면서 전국에 흩어져 있는 시청각 장애인들을 결집하는데 애를 쓰고 있다.


또 그의 어릴 적 꿈이던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창작활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 덕분에 각종 공모전에 응모하여 수상한 경력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그에게 가장 큰 감동과 힘을 주었던 것은 몇 년 전에 읽은 일본인 시청각장애인 교수 후쿠시마 사토시(동경대학교 교수로 재직)의 자서전이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 8월, 일본에서 열린 시청각장애인대회에 초청을 받아 직접 일본의 시청각장애인들의 자유로운 의사소통 현장을 몸소 체험하고 돌아온 바 있다. 그 후 그는 우리나라에서는 체계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던 손가락 점자(일명 '점화')를 정리하고 개발하여 주변의 시청각장애인에게 직접 교육하고 있는 중이다.

그와 함께 점화교육을 받고 있는 사람은 그의 부인을 포함하여 모두 4명. 시작은 미비한 셈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출발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석 달째 조씨와 함께 점화를 배우고 있는 김건형(40·시청각장애인)씨는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손등에 일일이 점자를 찍어서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 이 방식이 어색하고 낯설어 "그냥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안 돼?"하고 엄살을 피우기도 했다며 멋쩍게 웃었다.

a 김흥신(35)씨와 조영찬씨의 점화 교육 장면. 강아지 '모모'도 이 수업에 늘 함께 하고 있답니다.

김흥신(35)씨와 조영찬씨의 점화 교육 장면. 강아지 '모모'도 이 수업에 늘 함께 하고 있답니다. ⓒ 국은정

"처음 점화를 배울 때는 너무 답답했어요. 속이 터졌지요. 저는 그나마 귀에 보청기를 끼고 있어서 큰소리는 들을 수 있거든요. 그래도 배울 건 배워야지요. 이제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귀찮고 힘들어도 배워야 할 건 배워야지요."

끊임없는 독서와 인터넷 카페 활동, 문예창작, 그리고 점화 교육까지 조씨에겐 지금 하루 24시간도 아깝단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이 우리 사회의 시청각장애인들의 열악한 현실을 여실히 반영해주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하지만 이 시련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걸 믿고 있기에 힘들고 외롭지만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그에겐 또 하나의 포부가 생겼다. 전국에 있는 시청각장애인들과 함께 교류하고 결집할 수 있는 시청각장애인 단체를 결성하는 것이다. 이 또한 그가 걸어가야 하는 좁은 문이고 험난한 가시밭길임이 틀림없다. 그의 어깨에 맡긴 짐은 산꼭대기로 바위를 운반해야 하는 시지프스의 어깨처럼 무겁고 힘겨워 보였다.

조씨의 면접을 맡았던 나사렛대학교 점자문헌정보학과 이완우 교수는 "조씨는 상당히 똑똑하다"면서 "비록 그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소리 내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줄 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 교수는 "조씨가 우리 대학에 오면 공부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최대한의 도구와 도우미를 제공할 것"이라며 "그의 합격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슬픔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교수 또한 자신이 시각장애를 갖고 있어 어렵게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지금의 자리에 오게 되었다며, 조씨가 그간 겪었을 어려움을 충분히 알기에 조씨의 대학 입학을 도울 수 있는 후원자를 찾아보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역시 조씨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경제적인 어려움인 듯했다.

a 한국 최초로 점화 수업을 시작하고 있는 사람들, "함께라서 좋아요!"라고 말하는 그들의 수업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고, 또 그것을 널리 퍼뜨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한국 최초로 점화 수업을 시작하고 있는 사람들, "함께라서 좋아요!"라고 말하는 그들의 수업이 아름다운 결실을 맺고, 또 그것을 널리 퍼뜨릴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 국은정

필자는 조씨의 이러한 안타까운 사연을 해결할 수 있는 일말의 기대를 안고 교육인적자원부에 문의해 보았다. 하지만 현행 제도에서는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답변은 얻지 못했다.

또 해당 동사무소 장애인 복지 담당자도 "고등학생까지는 장애인들을 위한 교육비 지원이 있지만, 대학은 그렇지 못하다. 어느 특정 장애인에게만 혜택을 주는 것은 일반인들과의 형편성에 어긋난다. 후원할 수 있는 개인이나 단체를 알아보는 것이 더 빠를 것"이라는 답변만 들어야 했다.

배우고 싶어도 돈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나라, 헬렌켈러를 꿈꾸지만 그를 도왔던 사회의 몫은 슬그머니 감춰버리는 이 나라는 "나도 한국의 헬렌켈러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조 씨에게 과연 어떤 대답을 해줄까? 한국 사회에서 그의 꿈은 정말 실현 불가능한 꿈인가?

덧붙이는 글 | 조영찬 씨가 직접 운영하는 까페: <설리반의 손 헬렌켈러의 꿈> http://cafe.daum.net/deafblind

덧붙이는 글 조영찬 씨가 직접 운영하는 까페: <설리반의 손 헬렌켈러의 꿈> http://cafe.daum.net/deafbl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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