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88회

등록 2006.12.07 08:17수정 2006.12.07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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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철한이나 함곡과 마찬가지로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반효도 마찬가지였다. 설중행에게 자신이 데리고 들어와서 '여기에는 무슨 의도로 들어온 거야?'라고 엉뚱한 말을 물어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던 것도 이제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확실히 뭔가 있었다.

그렇다고 설중행의 탓은 아닐 것이란 사실은 풍철한이나 함곡 역시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설중행 역시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이용당하고 있는지 몰랐다. 풍철한과 함곡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능효봉 쪽으로 향했다. 저 자는 뭔가 알고 있을지 몰랐다.


@BRI@"………!"

허나 능효봉 역시 중의가 설중행을 치료한 돌팔이 의원이었다는 말에 약간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는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모습이었는데 매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다 풍철한과 함곡의 시선을 느낀 듯 예의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돌아왔다.

"또 왜 나는 잡아먹을 듯 보는 거요? 나 역시 중의어른을 한 번도 본적이 없소."

"저녁에 모두 술 한 잔 하기로 하지."

풍철한이 다른 때와 달리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술 한 잔 하자는 의미는 이제 좀 더 솔직히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능효봉이나 설중행에게 지금껏 대했던 피의자의 대우가 아니라 같이 협조하는 동료의 관계로 전환되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능효봉 역시 그런 의미를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애써 장난스런 표정을 띄우며 고개를 끄떡였다.

"알겠소. 뭐 술이라면 사양한 적이 없소."


풍철한과 함곡의 시선이 능효봉에게서 다시 중의라 생각되는 노인네를 향했다. 노인네는 힘겹게 앞서 가는 일행의 뒤를 쫓아 백팔제를 올라오고 있었는데 무의식적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면철비 앞에 서 있는 풍철한의 일행을 보며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 같더니 급히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낭패한 기색의 풍철한이 다시 허탈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삼불자란 별호는 분명 잘못된 거야…. 저 돌팔이는 악착같이 피 같은 내 은자 닷 냥 반을 알겨먹었거든…."

자신도 모르게 풍철한은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다.


47

"이제는 점차 나를 알아보는 인간들이 많아서 영 재미없구먼."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한 후에 한동안 시선을 죽어있는 친구의 시신에 못 박고 있던 노인네가 이미 축축해진 눈시울을 다른 두 친구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던진 농이었다. 이렇게 셋이 모이고 나니 죽은 두 친구에 대한 상실감이 맹렬한 고통으로 변하여 폐부를 찌른다.

함곡이 이미 알아보았던 바로 중의 공손정이었다. 왜소한 체구에 피부는 농부처럼 햇볕에 그을려 검고 거칠게 보였다. 특이한 것은 아주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름살도 그리 많지 않은 동안(童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이던가?"

보주가 물었다.

"여섯 번째일세."

성곤 담자기가 혀를 찼다.

"어째 자네는 그리 야박한가?"

친구를 만난 기쁨은 이미 목으로 삼킨 지 오래다. 같이 손을 맞잡고 그저 만남 그 자체로 가슴 뿌듯하게 만들 친구 하나가 세상을 달리한 채 관 속에 누워있었고, 자신이 온다는 소식에 맨발로 뛰어나오던 친구 하나는 자신의 거처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지 오래다.

"자네들에게 소홀하여 미안하이…. 두 사람 모두 며칠 동안 가슴이 미어졌겠군."

중의는 애잔한 시선으로 두 친구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마음 든든한 이 커다란 덩치의 친구와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내비치는 적이 없는 저 친구의 마음은 며칠 동안 얼마나 찢어졌을까? 더구나 두 친구 모두 이 운중보에 머물고 있는 사이에 다른 친구가 살해되었다는 사실에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자신이야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이 업인 사람. 일가붙이도 두지 않아 어디 한 곳에 정착할만한 곳도 없이 몇 달 동안 깊은 산 속에서 헤매며 약초를 캐러 다니거나 어디엔가 처박혀 연구에만 몰두하는 것이 인생의 낙으로 여기는 삶이었다. 그러다 보니 생사고락을 같이한 친구들에게마저도 소홀히 한다는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터.

운중보가 만들어진 이래 이번까지 겨우 여섯 번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비난받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러한 그의 행동으로 인하여 구룡과 혈전을 벌이던 시기에 무공으로 보면 가장 뒤처지는 그가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실 과거 그 당시 구룡은 동정오우 중 누구보다 먼저 중의를 사전에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의술이야 그렇다 해도 구룡에게 가장 막대한 타격을 입힌 것은 중의의 용독(用毒) 솜씨였다. 어떤 때는 갑자기 잠에 든 수하들 중 절반이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고 죽어있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아직까지도 자네는 더 얻어야 할 것이 있는 겐가? 이제 쉴 때도 되지 않았는가?"

성곤이 짐짓 화가 난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하자 중의는 고개를 과장되게 움츠린다.

"자네가 화내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내가 언제 화를 냈는가?"

우직했다. 친구들에게는 언제나 어떠한 것이든 양보했다.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방법도 몰라서 친구들은 그의 표정만으로도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까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군. 자네는 화내는 방법도 모르는 사람인 걸 잠시 잊었다네. 허허…."

"원… 사람도…. 이제는 놀리기까지 하는구먼."

"미안하이. 내 어찌 자네의 말뜻을 모르겠나?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이곳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네. 이제 여생은 우리 다섯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미주가효(美酒佳肴)를 즐기고 절경을 찾아다니기도 하겠다고 말일세."

그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제는 다섯이 아니다. 또다시 두 친구를 잃은 아픔이 폐부를 찔렀다. 잠시 대화가 끊기며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잘 생각했네. 나 역시 그런 생각을 가졌다네."

그 침묵을 깬 사람은 성곤이었다. 어차피 운중 저 친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이번 회갑연에 후계자를 정한다고 공표했을 것이니 말이다. 어색한 분위기에 중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시신이 된 친구에게로 다가갔다.

"허… 지금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지. 그러고 보니 저놈도 참는 것에 꽤 익숙한 녀석인 것 같구먼."

옥기룡의 전갈을 받고 상청(빈소, 殯所)을 차리고자 준비를 하러 들어왔다가 세 분이 계신 것을 알고는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상태로 있던 백도 자인을 보고 한 말이었다. 아무리 백도라 하나 사부의 친구들인, 아니 굳이 사부의 친구라 할 것 없이 사부처럼 대했던 분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움직일 수 없는 노릇.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여태껏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있던 차에 아무 말 없이 포권을 취하며 깊게 허리를 숙인다.

"너무 많이 손을 댔어…. 이래 가지고 어찌 단서라고 짚어낼 수 있을까?"

중의는 철담의 시신과 그 주위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상황은 분명했지만 중의에게는 그런 쪽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그로서는 철담이 어떻게 이리도 허무하게 당할 수 있었느냐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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