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멸망 22년 뒤인 690년에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무주)의 황제로 즉위한 측천무후의 초상화.위키페디아 백과사전 중국판
최근 6~7세기 고구려-중국 관계를 소재로 한 2편의 대하드라마가 높은 관심을 끌고 있다. 하나는 SBS의 <연개소문>이고, 또 하나는 KBS의 <대조영>이다.
30분 간격을 두고 방영되는 두 드라마에서 최근 서로 상반된 정서를 느낄 수 있다. 고구려-수나라를 다루고 있는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가 절정의 군사력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일종의 통쾌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반면, 고구려 멸망 직전의 상황을 다루고 있는 <대조영>에서는 배경음악만큼이나 어떤 우울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두 드라마를 동시에 시청하기 힘들기 때문에, <대조영>만 보는 시청자라면 출연진의 열연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고구려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 때문에 일종의 비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대조영> 시청자들이 그 같은 우울함의 절반 정도는 덜어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구려가 멸망한 지 22년만인 690년에 당나라도 멸망했기 때문이다.
흔히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도 당나라는 몇 백년간 더 존속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으나,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668년)한 후 690년에 당나라도 뒤따라 멸망했다.
@BRI@618년에 건국된 당나라가 실제로는 690년에 멸망했는데도, 중국의 역사에서는 당나라가 907년에 멸망했다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당나라가 멸망한 지 15년 뒤인 705년에 당나라를 계승한 정권이 등장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690년에 당나라가 멸망한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엄밀히 말하면 당나라의 역사도 전당(前唐)과 후당(後唐)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기원전 202년에 세워진 한(漢)나라는 기원후 8년 왕망(王莽)에 의해 멸망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원후 25년에 한나라의 계승자임을 표방한 나라가 세워졌다. 그래서 중국 역사에서는 한나라를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으로 구분하고 그 중간에 왕망의 신(新)나라를 자리 매김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나라 역시 이론상으로는 전한과 후한으로 구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후대의 중국 역사에서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냥 당나라로 부르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거기에 흥미로운 사연이 얽혀 있다고 생각한다. 690년에 당나라를 멸망시킨 사람은 왕망 같은 남자가 아니라 바로 여자였다. <대조영>에 나오고 있는 중국 황후 측천무후(무측천)가 바로 그녀다.
이야기를 전개하기에 앞서, 측천무후의 기구한 운명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아들’과 결혼해 기이한 삶을 산 여인이다.
측천무후는 본래 당 태종(太宗)의 후궁이었다. 당 태종 이세민이 649년 사망하자, 그녀는 궁궐에서 나와 비구니가 되었다. 그러다가 당 태종의 아들인 고종(高宗)이 즉위한 후, 다시 고종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남편의 아들’과 기이한 관계를 갖게 된 것이다.
고종이 죽자 그녀는 자신의 아들들인 중종·예종을 차례로 즉위시켰으며, 이후 점차적으로 권력을 확대해 690년에는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직접 주나라를 세웠다. 역사가들이 무주(武周)라고 부르는 주(周)나라를 세운 그녀는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즉위하고 연호도 천수(天授)로 바꾸었다. 705년에 멸망하기까지 측천무후의 나라는 15년간 존속했다.
15년이란 기간이 짧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국가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5호 16국 시대의 서연(西燕)은 10년밖에 존속하지 못했으며, 5대 10국 시대의 후한(後漢)과 후주(後周)는 각각 3년과 9년밖에 존속하지 못했다.
705년 무주(武周)의 뒤를 이어 등장한 정권이 당나라의 계승자임을 표방했다고 하더라도, 당나라는 엄연히 690년에 이미 멸망한 나라다. 그러므로 중국의 역사는 전당-무주-후당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게 정확한 평가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데도 중국의 역사에서는 무주를 인정하지 않으며, 당나라가 690년에 멸망했다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해석의 영역에 불과할 뿐 아닌가. 어떤 해석을 한다 해도, 당나라가 690년에 멸망했다는 건 객관적 사실이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그럼 중국 역사에서 왕망의 신나라는 인정하면서 성신황제(측천무후)의 주나라는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답변은 대체로 다음 3가지다.
첫째, 왕망의 신나라는 특색이 확실한 반면 성신황제의 주나라는 특색이 확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왕망은 이상적인 토지소유제인 정전제를 지향하는 등 ‘색깔’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지만, 주나라의 경우 별로 특색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것이 다소 궁색한 답변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역사상에는 확실한 색깔을 보여 주지 못했음에도 국가로 인정받은 나라가 많지 않은가.
그리고 성신황제의 통치가 별 특색이 없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과(功過)를 떠나 그녀의 통치는 여러 면에서 특이했다.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에서 이상적인 시대로 평가받고 있는 고대 주나라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이는 왕망의 신나라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주나라의 전통에 따라 역법·관명을 새로 제정한 것이 그 예가 된다.
그리고 측천무후는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각지에 특사를 파견하는가 하면, 관작(官爵)을 많이 수여하기도 하였다. 또 불교 건축에 힘쓰는 등 친(親)불교적 정책도 취했다.
둘째,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光武帝) 유수는 전한 마지막 황제인 평제(平帝)와 먼 친척이지만, 705년에 당나라를 계승한 중종(中宗)은 고종의 아들이므로 당나라가 사라진 것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다.
다시 말해, 후한 광무제는 전한의 방계 황족인 데 비해 중종은 당나라의 직계 황족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690년에 멸망한 당나라와 705년에 당나라를 계승한 정권 사이에는 고도의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중국 학자들의 주장이다.
또한 측천무후가 제위에 있을 때 자신의 조카인 무씨 가문 인사가 아니라 당 황족인 이씨를 직접 후계자로 채택했다는 점도, 당나라가 단절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중요한 근거다.
이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황위 계승은 방계 황족에게도 인정된다. 그렇다면, 단순히 방계냐 직계냐를 기준으로 해서 왕조의 연속성을 따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고종의 아들이며 중종의 형제인 예종(叡宗)이 무주에서 황태자로 책봉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당나라의 연속성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시각도 있지만, 필자는 이 역시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당나라의 황제가 무주의 황태자로 책봉되는 것은 이미 당나라의 국체(國體)를 파괴하는 것아닌가? 그리고 예종은 무주에서 이(李) 대신 무(武)라는 성을 받았다. 필자는 ‘당나라 황제’ 예종과 ‘무주 황태자’ 예종 사이에는 계통적 연속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필자는 어쩌면 이것이 더 본질적인 이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중국 역사에서 무주라는 나라가 인정되지 않는 세 번째 이유는 그 나라를 세운 사람이 바로 여자라는 점 때문 아닐까?
당나라의 측천무후 아니 무주의 성신황제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다. 필자는 무주를 부정하는 심리의 저변에는 남성 중심의 역사관을 지닌 과거 중국의 유교 지식인들의 터부가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측천무후가 왕망처럼 남자였다면, 중국 역사에서는 그녀의 나라를 무주로 인정하고 당나라를 전당과 후당으로 나누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무주의 성신황제가 여자인데다, 그녀가 황후 시절에 유교적 가치관으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화려한 결혼 편력’을 보였으며 남자들을 억누르고 권력을 장악했다는 점 때문에, 중국의 ‘남자’ 역사가들은 ‘그 여자의 나라’를 인정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심리적으로 인정하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중국의 역사가들이 왕망의 나라는 인정하면서 측천무후의 나라는 인정하지 않는, 이 비논리적인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녀가 여자였다는 점이 핵심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과거의 중국인들이 측천무후를 인정하기 싫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득이하게 측천무후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측천무후는 당시 중국의 정치적 모순을 바꾸려 하고 인재를 등용했다는 점 때문에 송나라 역사가인 사마광(司馬光) 등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위와 같은 여러 이유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는 무주와 성신황제가 인정되지 않고 당나라와 측천무후만이 인정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역사에서 그녀의 나라를 인정하든 않든 간에, 측천무후가 실제로 690년에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웠다는 점만큼은 불변의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705년에 건국된 나라가 690년 이전의 당나라를 계승했다는 것은 해석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라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690년에 당나라가 만약 남자에 의해 멸망했다면, 후대 역사에서는 ‘역사상의 라이벌이었던 고구려와 당나라가 비슷한 시기에 함께 멸망했다’는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그런데 당나라를 멸망시킨 주인공이 여자라는 점 때문에 당나라의 멸망이 ‘해석’에 의해 감추어지고 그로 인해 ‘고구려만 멸망하고 당나라는 멸망하지 않았다’는 오도된 역사 인식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라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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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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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고구려 멸망 22년 후 당나라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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