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선'에 담긴 '노블리스 오블리제'

해남 윤씨가, 가훈 통해 도덕적 의무 강조

등록 2006.12.12 08:39수정 2006.12.12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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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우당 해남 윤씨가의 가훈으로 전해져 오는 '충헌공 가훈'
녹우당 해남 윤씨가의 가훈으로 전해져 오는 '충헌공 가훈'정윤섭

@BRI@최근 새로운 사회 흐름 중에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높은 사회적 신분이나 가진 자에게 그에 걸맞는 도덕적 의무를 요구하는 이러한 흐름은 본래 로마시대 사회 고위층의 공공봉사와 기부, 헌납의 전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대표격인 집안으로 경주 최부자집을 말하곤 한다. 오늘날 기업의 경영주나 소위 가진 자가 그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없는 자에게 베풀 줄 아는 전통이 무엇보다 필요한 이때에 계급사회인 조선시대에도 이러한 집안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자선’이나 ‘기부’같은 현대적 의미의 뜻을 유교 윤리인 ‘적선(積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적선은 거지에게 자선을 베푼다는 것쯤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조선 신분사회에서 지배계층을 형성했던 양반 사대부들에게 일종의 유교(성리학)적 사회윤리로 적선을 실천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 적선이라는 것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했던 집안이 경주 최부자집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대체로 이러한 집안의 가풍은 ‘가훈’을 통해 그 전통이 이어지곤 한다. 경주 최부자집에는 여섯 가지의 가훈이 내려오고 있다고 하는데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둘째 재산은 만석 이상 갖지 마라. 셋째, 과객은 후하게 대접하라. 넷째,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다섯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여섯째,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은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뜻이 대부분의 항목 속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집안에서는 일년 농사 중 3분의 1은 손님이나 이웃을 위해 베풀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베풀고도 10대에 걸쳐 만석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기업가나 소위 가진 사회지도층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들이나 장손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개념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기부하는 문화가 작지만 최부자집은 일찍부터 이러한 기부문화를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적선의 가풍과 충헌공 가훈


'삼개옥문 적선지가'를 실천한 어초은 윤효정의 묘
'삼개옥문 적선지가'를 실천한 어초은 윤효정의 묘정윤섭
그런데 적선(積善)의 가풍을 잘 보여주고 있는 집안이 녹우당 해남 윤씨가다. 해남 윤씨가 족보를 보면 맨 앞에 녹우당의 개시조인 어초은 윤효정을 ‘삼개옥문(三開獄門) 적선지가(積善之家)’로 묘사하고 있다. 이 말이 생겨난 것은 생활이 어려워 나라에 세금을 내지 못하고 옥에 갇힌 사람을 윤효정이 세 번이나 대납하여 그들을 풀어나게 해주었다는 데서 생겨난 말이다. 녹우당에서는 이를 하나의 가훈처럼 여기고 늘상 말하곤 한다.

고산의 ‘충헌공 가훈’을 보면 이 적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경주 최부자집에서 여섯 가지의 가훈이 내려온 것처럼 녹우당 해남 윤씨가에도 가훈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고산의 시호를 따서 붙인 ‘충헌공 가훈’이다.


충헌공 가훈은 고산이 74세에 멀리 함경도 삼수로 귀양을 떠나면서 아들인 인미(仁美)에게 편지글 형식으로 남긴 교훈서다. 가훈의 내용은 주로 소학(小學)의 실천윤리를 강조하면서 ‘적선’과 ‘근검’이 집안의 융성을 위한 최고의 덕목임을 내세우고 이를 꼭 지켜나가기를 당부하고 있다. 그런데 가르침 중엔 최부자집에서 말한 것과도 상당히 비슷한 점이 있어 당시 유교사회가 지향하는 윤리의식을 읽을 수 있다.

고산은 충헌공 가훈을 통해 아들 인미에게 이르기를 방(榜, 과거합격자 명단)이 붙을 때마다 낙방하는 것은 근면하지 못한 소치로 하늘의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적선을 하는 데에 있다. 너희는 수신(修身)과 근행(勤行)으로 적선하고 인자한 행실을 제일 급선무로 여기라 한다. 그리고 적선을 하고, 하지 않는 것에 따라 대가 끊기고 이어지는 것이 결정된다고 할 정도로 적선을 강조하였다.

충헌공 가훈에서 항목으로 명시한 몇 가지 사례를 보면 먼저, 의복이나 말 등 몸을 치장하는 모든 구습을 버리고 폐단을 없애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여러 번에 걸쳐 노비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우대해주고 구휼해 주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노비에게 거두어들이는 세금으로 그동안 기준이 없던 것을 ‘노(奴)는 평목(平木) 2필, 비(婢)는 한필 반’으로 하고 역(役)이 많은 사람은 역을 덜어주고 부자는 더하지 않는다고 그 기준을 정해주고 있다.

그리고 소학(小學)은 사람을 만드는 것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고산이 소학을 실천윤리로 중요시하는 것은 유학에서의 이상적인 정치인 도치(道治)를 실현하기 위해 백성을 위한다는 애민(愛民)사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에서 요구하는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의 경제 논리로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절대적 경제논리는 이윤의 극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공유 속에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한다. 인위적으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없는 자에 대한 배려가 이러한 사회윤리로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베푼다는 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고 소위 서구에서 말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사상이 우리의 전통윤리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그 적선의 사회윤리는 베풀 줄 아는 자만이 대를 잇게 된다는 고산의 충고처럼 부의 지속도 이를 통해 보장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한다.

재산상속 문서 분재기

재산내역을 기록하고 있는 분재기로 해남 윤씨가의 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재산내역을 기록하고 있는 분재기로 해남 윤씨가의 재력을 보여주고 있다.정윤섭
조선시대에 많은 재산을 소유한 집안에서는 그 재산을 기록한 분재기를 남겼는데, 분재기는 재산의 상속과 분배에 관한 문서로, 주로 재산의 주인이 자녀를 비롯한 가족에게 재산을 상속하거나 분배해준 문서를 말한다.

조선시대의 분재기는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당시 재산상속의 내역은 가옥·토지·노비·가재도구 등이고 주로 노비나 토지의 상속·분배가 많았다. 녹우당 해남윤씨가에는 부자집안답게 이러한 분재기가 많이 남아 있다.

고산대에 남겨진 것을 비롯하여 공재 윤두서 대에 만들어진 것은 두루마리에 말린 것이 수m에 이를 정도로 방대한 것을 볼 수 있다. 분재기를 보면 토지나 노비를 물려준다는 기록들이 세세하게 적혀 있어 당시 가족이나 경제생활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기도 한다.

당시 사회가 농업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토지는 가장 큰 부의 척도가 되고 그것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노비가 필요해 노비 또한 가장 큰 재산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해남 윤씨가의 재산관리 내지는 재태크(?)는 표면적으로 장자 상속이나 매입, 입양들을 통해 문중재산으로 철저하게 관리해 온 탓도 있지만 적선이라는 사회윤리를 꾸준히 강조하고 실천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제로는 베풀 줄 모르고 인색했던 인물들도 있었겠지만 그럴 경우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근대의 경우 후손 중에 몰락한 집안도 여럿 찾아 볼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주변의 인심을 얻어야 하고, 그것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적선(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우리의 사회윤리다. 이는 곳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교훈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당대에 흥했다 망해 가는 수많은 집안과 기업들을 보면서 그 부가 오래도록 지속되기 위한 진정성은 ‘적선’ 이라는 우리 식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의지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덧붙이는 글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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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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