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온 날은 다함께 '느림보' 되는 날

대설주의보가 내린 우리 동네 밤새 '눈 잔치'

등록 2006.12.17 10:10수정 2006.12.1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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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밤 서울과 경기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다고 합니다. 올겨울 들어 눈이 온 것은 벌써 몇 번째지만 이렇게 펑펑 쏟아지기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늦은밤 가게에 뭘 좀 사러 나가다 뒤늦게 눈이 오는 것을 알고 급히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겨 '밤눈 맞이'에 나서봤습니다.


a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창문을 두드리며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는 듯합니다.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이 창문을 두드리며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는 듯합니다. ⓒ 박정민

늦은 시간이지만 주말이라서인지 골목길엔 작은 난리가 났습니다. 고작 10도도 안될 경사를 차들이 올라가지 못해 쩔쩔 매고 있어서입니다. 택시도 예외가 아니더군요. 당사자들은 얼마나 곤혹스러울까 싶어 카메라는 꺼내지 않고 눈에만 담아둔 풍경이었습니다. 꿩 대신 닭으로 얌전하게 눈을 맞고 있는 자전거들을 찍어왔습니다.

a 아파트 한켠의 자전거들. 씨름 중인 자동차와는 달리 그 자리에서 얌전히 눈을 맞고 있습니다.

아파트 한켠의 자전거들. 씨름 중인 자동차와는 달리 그 자리에서 얌전히 눈을 맞고 있습니다. ⓒ 박정민

a 확실히 눈에는 정화의 힘이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무덤덤하기만 하던 동네 풍경을 어느새 이리도 소담스럽게 바꿔놓으니 말입니다.

확실히 눈에는 정화의 힘이란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무덤덤하기만 하던 동네 풍경을 어느새 이리도 소담스럽게 바꿔놓으니 말입니다. ⓒ 박정민

자가운전을 하시는 분들, 특히 운전이 일인 분들은 눈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안전도 안전이지만, 느려지고 그래서 손해를 본다는 것이 큰 이유겠지요.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눈이야 넓은 지역에 걸쳐 공평하게 내리는 것이 아닌가, 눈 온 날은 그냥 '느리게 사는 날'로 지정하고 모두 함께 느림보가 되어보면 어떨까.

속도가 생명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당치도 않은 상상이겠습니다만, 그 속도 때문에 얻는 이익 못지 않게 잃는 것도 만만치 않음을 상기해보면 영 어긋나는 소리도 아니지 않을까요. 핑계야 얼마나 좋습니까. 천재지변. 큰눈이 오는 날이야 일 년에 며칠밖에 되지 않을테고 말이죠. 농한기도 없어진 세상, 이렇게 가끔 느려져보는 것도 손해볼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동네 뒷동산에 올라가봅니다.

a 뒷동산으로 올라가는 길, 앞선 발자국들이 있습니다. 부지런한 누군가가 벌써 밤눈맞이 산책에 나선 모양입니다.

뒷동산으로 올라가는 길, 앞선 발자국들이 있습니다. 부지런한 누군가가 벌써 밤눈맞이 산책에 나선 모양입니다. ⓒ 박정민

a 눈이불을 덮은 겨울숲은 해탈한 양 그대로입니다. 달리 덧붙일 말이 없군요.

눈이불을 덮은 겨울숲은 해탈한 양 그대로입니다. 달리 덧붙일 말이 없군요. ⓒ 박정민

생각 밖의 장관입니다. 고작 5분이면 다 올라가는 자그마한 뒷동산인데도 명색이 눈 쌓인 숲이 되고 나니 영 딴판으로만 보입니다. 동네 바로 옆이라 군데군데 가로등도 있고, 없다고 해도 워낙 밝은 대도시의 밤이라 골목만큼이나 환한 탓에 설경 감상에 더 없이 좋습니다. 진짜 산에서는 생각하기도 힘든 또 하나의 풍경을 발견한 날이 되었습니다.

a 눈사람이 동네 여기저기에서 밤을 지키고 있습니다. 크기도 인상도 각양각색입니다.

눈사람이 동네 여기저기에서 밤을 지키고 있습니다. 크기도 인상도 각양각색입니다. ⓒ 박정민

골목길을 뒤지다 보니 눈사람들이 보입니다. 지금도 아이들은 눈사람을 만들고 있군요. 왠지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크고 빠른 서울의 구석구석을, 자그마한 함박눈 송이들은 천천히 메워가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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