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눈은 내가 치워요

개미군단 같은 주민들이 팔을 걷었다.

등록 2006.12.17 14:46수정 2006.12.1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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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베란다에서 내려다 본 설경

베란다에서 내려다 본 설경 ⓒ 김재경

a 합심하여 눈을 치우는 주민들

합심하여 눈을 치우는 주민들 ⓒ 김재경

a “어유~ 힘들어.” 허리를 펴는 주민들

“어유~ 힘들어.” 허리를 펴는 주민들 ⓒ 김재경

일요일 아침, 따끈따끈한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이는데 방송이 나온다.


“주민 여러분! 눈이 많이 내렸으니, 모두들 눈 치우기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웬 눈? 그렇다면 폭설이 내려서 잠자리가 포근했던 거구나’ 생각하며 베란다로 나갔다.

@BRI@베란다에서 내려다 본 탐스런 설경은 신이 만든 최대의 걸작품이자 아름다움의 극치였다. 서둘러 방한복을 입고 나갔다. 아이부터 어른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먼저 나와서 수북한 눈을 치우기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어이구, 늦잠이 들어서...”

겸연쩍어 하며 위층의 경욱이 아빠가 뒤따라 나왔다. 차량 위에 수북이 쌓인 눈을 뭉치는 아이와 빗자루로 쓸어내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다정하게 눈에 들어왔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폭설이지만, 남자들은 넉가래로 밀어내고 삽으로 퍼서 화단에 던진다. 주민들이 합심하여 개미군단처럼 한 시간 남짓 팔을 걷으니 수북했던 눈은 흔적조차 없이 말끔해졌다. 지난해 동사무소에서 단지별로 사준 제설 장비가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좀 늦게 나온 탓에 장비도 없고, 딱히 여자인 내가 할 일이 없어 보였다. 따끈한 차라도 접대하려고 서둘러 집에 올라왔다. 물을 끓이며 컵을 찾았지만, 일회용 컵은 보이지 않았다.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컵을 사러 옆 단지의 슈퍼로 갔다. 그 단지는 대규모임에도 불구하고, 경비원 한 분이 쓸쓸히 고작 눈길 통로만을 트고 있었다.


종이컵을 사오는 길에 위층 할머니를 만났다.

“마땅히 눈을 치워야 하는데 다리가 아파서...”라며 할머니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쟁반을 내민다.

“9층 할머니가 타온 커피예요. 마시고 하세요.” 쟁반 가득한 커피를 돌리고, 집에 들어왔다. 물이 끓는 주전자를 들고, 향이 그윽한 헤이즐넛 커피와 녹차, 둥글레차을 준비해서 돌렸다.

a 출입구를 쓸던 초등학생이 포즈를 취해준다.

출입구를 쓸던 초등학생이 포즈를 취해준다.

a 아파트 밖 노면은 눈이 녹아 질척거린다.

아파트 밖 노면은 눈이 녹아 질척거린다. ⓒ 김재경

a 눈덩이를 굴리는 가족들

눈덩이를 굴리는 가족들 ⓒ 김재경

a 차량 위의 눈을 쓸어 내는 모자.

차량 위의 눈을 쓸어 내는 모자. ⓒ 김재경

206동 출입문 앞에는 왁자지껄 웃으며 희성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예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더니 덩달아 포즈까지 취해준다.

놀이터에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어울려 눈덩이를 굴리며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눈싸움하는 모습을 아주 오랫만에 볼 수 있어서 더욱 정겨웠다.

208동 앞에는 반바지 차림으로 넉가래를 미는 주민의 모습도 보였다. 다 치운 길이 얼어붙을까 염화칼슘을 뿌리고, 말끔해진 주차장은 바라보는 마음까지 후련하다.

조상묵 208동 동대표는 “어젯밤에 관리소 직원들하고 동 대표들이 새벽 2시까지 눈을 치우다가 출출해서 소주 한잔하고 새벽 4시에 집에 들어갔지요. 단잠을 자는데, 아침 8시쯤에 주민 한 분이 눈을 치우자고 연락이 왔어요. 얼마나 고맙던지... 그래서 최재근 동대표 회장이 방송을 해서...”라며 개미군단의 출연 과정을 설명했다.

흔히들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나만 아는 이기주의라는 말을 쉽게 한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 팔을 걷고 나와서 인사 나누며 하나 되는 단결력을 보여주는 사람냄새 나는 정겨운 아파트에 우리가 살고 있음이 가슴 든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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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인간 냄새나는 진솔한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현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이며 (사) 한국편지가족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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