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태후 과거 '불명예'에서 벗어날까?

중국 재평가 진행....청나라 멸망 원인 놓고 의견 엇갈려

등록 2006.12.18 11:44수정 2006.12.1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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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에서 복권되고 있는 서태후. 그녀는 19세기 후반 중국의 실질적인 '황제'였다.
최근 중국에서 복권되고 있는 서태후. 그녀는 19세기 후반 중국의 실질적인 '황제'였다.
최근 한국·중국에서 나타나는 역사인식상의 변화 중 한 가지는 두 여인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명성황후(1851~1895년)와 서태후(1835~1908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조선과 청나라가 외세의 공세에 시달리던 19세기말에 일세를 풍미하다가 사후에는 망국의 책임을 떠안아야 했던 두 여인이 사후 약 100년 만에 다시 명예를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두 여인 중에서 먼저 복권되기 시작한 쪽은 명성황후다. 명성황후는 이미 1990년대부터 복권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주로 뮤지컬·드라마·소설·교양서적 방면에서 이어지고 있다. 학계의 연구성과는 상대적으로 이에 못 미치는 실정이다.

복권의 징후는 호칭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예전에는 흔히 '민비'라는 비칭(卑稱)으로 불리던 그녀는 이제는 어엿한 황후 대접을 받고 있다. 1987년에는 정비석의 <소설 민비전>이 발행된 적이 있지만, 1995년과 2001년에는 그 정비석의 이름으로 <명성황후전>이 발행되었다는 점은 호칭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동시대에 살았던 명성황후의 '부활'에 자극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중국에서는 서태후를 '무덤'에 일으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사치와 탐욕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또 청나라 멸망의 책임을 혼자 떠맡다시피 한 서태후가 적극적인 명예회복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서태후에 대한 재조명 작업은 역사공정의 하나인 청사공정(淸史工程)의 일환으로 전개되고 있다. 청사공정과 관련하여서는 이미 100여 종 이상의 서적이 출간되었으며, 청나라 멸망 100주년인 오는 2012년에는 <청사>가 완성될 예정이다.

청사공정에 참여한 바 있는 중국 청화대 교수의 말에 따르면, 청사공정에서 특징적인 점 한 가지는 '청나라 멸망의 주범이 누구인가'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다. 종래에는 서태후를 포함한 만주족 황실의 사치·무능·탐욕 등 때문에 청나라가 멸망하였다는 인식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도리어 한족 관료들에게 그 '공'이 넘어가고 있다.

서태후 등은 청나라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보인 반면, 청류파(淸流派) 같은 한족 관료들은 변화와 개방을 거부하다가 실력 양성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태후가 자연스럽게 과거의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있다.


서태후에 대한 재평가

@BRI@서태후의 '혐의'를 벗겨 주기 위한 작업은 크게 3가지 각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 역사학자들의 언급을 근거로 이 3가지를 간략히 설명하기로 한다.


첫째, 중국 학자들은 "서태후가 아니었더라도 청나라는 이미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는 논지를 펴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15, 6세기 이래 유럽 경제의 발달과 신항로·신작물의 출현에 따라 유럽-미국-중국이 상호 연동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도광제(道光帝, 재위 1820~1850년) 시절에는 외국 쌀이 중국 시장을 교란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건륭제(乾隆帝)의 총신(寵臣)인 화신의 농단으로 인해 이미 가경제(嘉慶帝, 재위 1796~1820년) 시기부터 청나라의 재정이 고갈되기 시작하였으며, 도광제 때에 이르러서는 무역적자까지 나타났다는 것이 그들의 언급이다. 이와 같은 점들을 근거로, 중국 학자들은 서태후의 사치 때문에 청나라가 재정위기를 겪은 게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둘째, 중국 학자들은 서태후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녀가 태평천국(1851~1864년) 이후에 사회질서를 재건하였고, 유능한 한족 관료들을 중용하였으며,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주도했다는 점 등을 강조하고 있다.

셋째, 중국 학자들은 서태후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한족 강경파들의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청류파로 대표되는 한족 강경파들이 양무운동을 반대하고 또 신문물 수용을 반대함으로써 근대화 작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그리고 흔히 서태후의 발언으로 알려진 "내 나라를 이웃나라에 줄지언정 가노(家奴, 백성)들에게는 주지 않겠다"는 발언도 실제로는 일본에 망명 중이던 혁명파들의 입에서 나온 것일 뿐, 서태후가 실제로 그런 발언을 했다는 실증적 근거가 없다는 점도 강조되고 있다.

위와 같이, 19세기 후반의 40년 동안 중국을 풍미했던 권력자 서태후는 사후에 망국의 책임을 혼자 떠맡다시피 했다가, 죽은 지 100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그럼, 서태후가 이처럼 복권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최근 중국 역사학자들이 사료를 중심으로 치밀한 고증작업을 벌이고 있다. 종래에 별다른 근거도 없이 나돌던 서태후에 관한 '안 좋은 소문'들이 치밀한 작업을 통해 하나씩 시정되고 있다.

둘째, 한족 중심의 현 중국 정부가 만주족을 적극적으로 통합하려 하고 있다. 이 점은 다른 역사공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주족인 서태후의 이미지를 재조명함으로써 만주족의 '마음'을 사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만주족을 적극적으로 통합하려는 것이다.

셋째,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있다. 흔히 중국은 여성의 지위가 높은 나라라고 인식되고 있지만, 모든 영역에서 다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역사라는 영역에서는 중국 여성들도 차별을 받고 있었다. 측천무후가 690년에 세운 후주(後周)라는 나라가 정식 왕조로 인정되지 않는 데에서도 그 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속설은 흔히 여성의 정치 참여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점은 한국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개혁·개방 이후 중국 내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역사 속의 여성에 대한 인식도 개선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청나라는 암탉 때문에 멸망한 게 아니라 수탉(한족 강경파) 때문에 멸망했다'는 인식상의 역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 역사학자들이 조만간 '신상품'으로 내놓을 서태후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나타날까. 역사상의 인물이 시대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매번 재창조를 거듭하는 것에 대중들은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릴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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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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