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에 7080? 판소리엔 1050이 있다!

[판소리 축제] 세대별로 나누어 부른 <흥보가> 한마당을 가다

등록 2006.12.18 15:04수정 2006.12.1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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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하는 말로 '막귀'에 속한다. 소리라는 것은 그저 적당히 즐거우면 그만이라는 신조다. 시쳇말로 SS501이나 베토벤이나…. 가요건 팝이건 클래식이건 대충 들어서 좋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문화적 소양하곤 애초부터 먼 사람이라는 것이 부끄러운 고백이다.

그런 사람이 판소리 마당에 가게 될 기회가 생겼다. 때가 되면 돌아와 효도공연을 여는 ‘마당놀이 한마당’이 아닌 정말 판소리인 것이다. 과연 공연자들의 정성, 그 절반만큼이라도 느낄 수 있을까. 기대만큼의 부담을 안고 머뭇거리며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a 10대에서 50대 까지 '흥보가'를 나누어 부른 이들. 왼쪽 부터 김유경, 유수정, 윤재원, 안숙선, 김미진 씨.

10대에서 50대 까지 '흥보가'를 나누어 부른 이들. 왼쪽 부터 김유경, 유수정, 윤재원, 안숙선, 김미진 씨. ⓒ 판소리 축제

판소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모여 만든 1050 한마당

지난 14~15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에서 열린 <판소리축제> 현장.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를 기념해 열리기 시작했고 올해가 3회째다. 여타 행사와 무엇보다 다른 점은 거대 공연기획사가 아닌 판소리를 사랑하는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행사라는 것.

@BRI@한편 이번 행사 2일째는 판소리의 세계화를 화두로 삼고 <적벽가>와 현대무용의 만남, <춘향가>와 발레와의 조화 등을 공연해 '보는 판소리'에도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그간 현대무용과의 만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판소리가 주체가 되어 무용어법이 아닌 판소리의 호흡으로 시도하는 행사는 이번이 처음 인 것.

그 중 첫 날 행사에 참가해 들은 것은 '만정제 판소리 흥보가 연창'이었다. 만정제는 김소희 명창이 스승 송만갑·정정렬·정응민 등의 소리 대목을 재편집한 바디(스승으로부터 전승해 한 마당 전부를 음악적으로 다듬어 놓은 소리)이다.

세계문화유산 기념사업회 회장이기도 한 안숙선 명창은 인사말을 통해 “세계가 인정해 준 우리 판소리의 진면목을 알리는 방법에 대해 고민 중이다. 그 일환의 하나로 오늘은 10대부터 50대까지의 이들이 각 세대별로 해석하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이야기를 남겼다.


이날 공연은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흥보가>를 다섯 대목으로 나누어 부른다. 그런데 그 다섯 사람의 세대구성이 흥미롭다. 안숙선 명창의 소개대로 10대부터 50대까지 차례로 무대에 모른다.

10대 윤재원군이 가장 앞부분을 시작해 '한 곳을 당도하니'까지를 부르고 나면 나머지 부분을 각 세대별로 출연해 이어가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엔 안숙선 명창이 자리한다. 판소리계의 프리마돈나, '소리는 몰라도 안숙선은 안다'는 말이 나도는 판소리계의 '국민소리꾼'이다. 그 소리를 가까운 곳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벼운 흥분이 일기 시작한다.


a 어린 나이 답지 않게 노련함을 보여준 윤재원군은 초등학생이다.

어린 나이 답지 않게 노련함을 보여준 윤재원군은 초등학생이다. ⓒ 판소리 축제

예상은 했지만 이 날의 유일한 남자 출연자인 윤재원(12ㆍ초등5년)군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아동방(我東邦)이 군자지국이요, 예의지방이라"로 시작하는 첫 대목의 소리가 문외한의 귀에도 맵살스러울 정도로 칼칼하다.

"초상난 데 노래하고 역신 든데 개 잡기와 남의 노적에 불 지르고 가뭄 농사 물꼬 베기, 불붙은 데 부채질, 야장(夜葬)할 때 왜장치기, 혼인뻘에 바람 넣고…(중략) 소경 의복에 똥칠하기 배앓이 난놈 살구 주고 잠든 놈에 뜸질하기, 닫는 놈에 발 내치고 곱사등이 잦혀놓기…"

익히 알 법한 구절이지만 슬슬 흥겨운 웃음이 흐른다. 이어 20대의 김미진(29ㆍ국립창극단)씨가 '흥보 마누라 기가 막혀'를, 30대의 김유경(33ㆍ국립창극단)씨가 '아침밥을 지어먹고'와 '그런 데로 내가 알고'를 구성지게 들려주었다.

그 사이 어느 사이엔가 등을 기댔던 관객들이 허리를 굽히고 간절히 눈을 반짝이고 있다. 무어랄까, 흥도 나지만 애절한 느낌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랬다. 흔히 알고 있는 <흥보가>는 해학성이 돋보이는 남성의 소리이다.

그 경우 질펀하고 뒤틀린 재담이 뒤섞여 익살스러운 느낌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여성의 소리는 다르다. 웃음 뒤의 슬픔이 간절하면서도 차분하게 깔려나간다. 끊길 듯 이어지고 가라앉을 듯 터져 나오는 절절한 비원이 보이지 않는 끈이 되어 객석을 잡아끈다.

세대를 뛰어 넘는 열창의 무대, 부디 세계와 소통하길…

a '흥보가'의 마지막 부분을 맡아 원숙함을 보여준 안숙선 명창.

'흥보가'의 마지막 부분을 맡아 원숙함을 보여준 안숙선 명창. ⓒ 판소리 축제

다음은 40대의 소리다. 유수정(46) 명창이 '중 나려온다'에서 '가난이야' 부분을 열창한다. 세상살이 애달픔을 알아버린 중년의 목소리가 폐부 곳곳을 찔러온다. 명불허전, 명창 김소희 선생의 제자, <춘향가> 6시간 완창의 관록이 바라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어지는 마지막 무대, 가쁘게 달려왔던 무대의 피날레는 안숙선(57) 명창의 몫이다. 감히 그 소리의 깊이야 문외한이 논할 바가 아니지만 공연 중간, 목을 축이는 것마저 관객들과의 어울림으로 이끌어 내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어기여라 톱질이야 당겨 주소 톱질이야. 우리도 이 박 타서, 쌀도 일고 물도 떠서, 가지가지 잘 써보세."

'박타령'에서 톱의 한쪽은 객석에 넘긴 듯하다. 각자가 고수가 된 듯 추임새를 던져가며 소리의 파도에 몸을 맡긴다. 공연자와 지켜보는 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맷돌 가운데 녹두가 녹아들듯, 절구질 사이로 고운 떡이 이겨지듯 흥겹게 섞여 들어가는 어울림…. 시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긴 박수로 공연장을 맴돌았다.

마지막, 미안함과 뿌듯한 감동이 뒤섞인 감정을 마무리하고 자리를 일어설 때 안숙선 명창이 남긴 한마디가 가슴을 찔러왔다.

"한편 세계화를 고민하지만 우리 내부에서는 보존에도 급급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찬 바람이 부는 거리. '판소리는 우리 것' 이라는 명제를 지켜가려 하는 이들의 간절하고 애끓는 목소리는 그렇게 12월의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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