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 눈에 어린 '갈대의 순정'

얼른 봄이 와서 어르신이 게이트볼도 배우고 친구도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등록 2006.12.20 18:17수정 2006.12.21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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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둔치 갈대 무더기. 어르신만의 갈대의 순정이 떠오릅니다.

둔치 갈대 무더기. 어르신만의 갈대의 순정이 떠오릅니다. ⓒ 김관숙


둔치 게이트볼 구장은 지난번 온 눈이 녹아들어 아직도 운동화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힐 정도로 젖어 있습니다. 그래도 오는 22일 우리 구 송년 게이트볼 동호인 대회에 출전하려면 연습을 많이 해 두어야 합니다.


지난 달 14일에도 우리 구 동호인 대회가 있었는데 내가 속해 있던 팀이 1승만을 거두고는 지는 바람에 하루 종일 다른 팀들이 하는 경기만을 구경해야 했습니다. 그 참담함은 아무도 모릅니다. 이번엔 좋은 성적을 내고 싶습니다.

@BRI@땅이 젖어 있으면 볼이 스틱이 때린 속도를 따라주지를 못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연습을 하기 위해 남편은 쭈그리고 앉아 돌멩이로 탕 탕 게이트를 세우고 나는 스틱에 헤드를 끼어 바짝 조입니다.

아까부터 한 무더기 갈대 옆에서 잔잔한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동네 어르신의 모습이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아마 12월 마지막 달이 중순을 넘어서고 강물은 푸르고 갈대들은 서걱거리고 그래서 또 전에 살던 동네가 생각이 나면서 세상을 떠난 남편이 그리워지신 듯합니다.

어르신이 살던 동네에는 갈대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가을걷이 끝내놓고 장작불 뜨끈하게 땐 방에서 우스개 소리 잘하는 남편과 아궁이 잿불에 구워낸 고구마를 까먹다가 아우성치는 까치소리에 방문을 열라치면 방문 열어 부치는 소리에 감나무에 까치들은 모두 달아나 버리고 앞벌에 무더기무더기 피어 있는 갈대들만이 하얗게 웃고 있고는 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 아름다운 정경 이야기를 열 번도 더 들었습니다.

어르신은 작년에 남편이 세상을 버리자 평생을 살던 그 집을 떠나 우리 동네 사는 아들네에서 단란하게 살고 있습니다. 칠순 후반인 어르신의 고정된 외출은 일주일에 서너 번 둔치에 나와 걷기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르신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여기 게이트볼 구장에서입니다. 지난 봄내 여름 내 나는 남편과 같이 햇살이 여린 아침나절이면 둔치에 나와 게이트볼 연습을 하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걷기운동을 끝낸 어르신이 구장 앞 의자에 와서 우두커니 앉아서는 우리를 바라보고는 했습니다. 늘 혼자서 그랬습니다. 자연스럽게 준비해 가지고 나온 음료수와 과일을 어르신과 같이 나누어 먹게 되었고 그러다보니까 이제는 아주 친숙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a 단음식은 끊고 사는데 어르신이 내놓은 인삼사탕은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단음식은 끊고 사는데 어르신이 내놓은 인삼사탕은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 김관숙


어느 날인가 어르신이 스포츠복 바지 주머니에서 인삼사탕 한 줌을 꺼내 내놓으면서 말했습니다.


"갈대의 순정 한번 들어볼래?"

남편은 의아해 하는 표정으로 어르신을 보았고 나는 그런 남편과 어르신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인삼사탕을 입에 문 채로 '사나이 우는 마음을 누가 아랴~'를 허밍으로 조그맣게 불렀습니다. 어르신은 유순하게 웃다가 말했습니다.

"거 말구, 내 갈대의 순정말야."

어르신은 그날 처음으로 남편과 살던 그 아름다운 정경을 들려주었습니다. 이후 열 번도 더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어르신의 부드럽고 정 많은 말투 때문인지 들을 적마다 처음 들었을 때처럼 가슴이 뭉클거리며 슬퍼지고 어르신이 안 되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20일)은 날씨가 좋은 편입니다. 바람이 없어 별로 춥지도 않습니다. 누런 잔디밭에서 비둘기들이 날아오르고 아주 가끔씩 걷기 운동하는 사람이 보일 뿐 사방이 텅 비었습니다.

남편과 볼 5개씩을 나누어 가지고 두 사람이 치는 경기를 한참 하다가 보니까 한 무더기 갈대 옆에서 강물을 바라보던 어르신이 어느새 구장 바로 앞 의자에 와서 앉아있습니다. 내가 메고 온 가방이 놓여 있는, 늘 어르신이 앉던 그 자리입니다. 별로 춥지 않은 날씨라 해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으슬으슬 추운 법입니다. 감기라도 드시면 어쩌나.

두터운 잠바에 붙은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한 어르신의 작은 모습이 차가운 푸른 하늘을 등지고 있어서인지 오늘따라 더 작아 보이면서 외롭고 쓸쓸해 보입니다. 그만 나는 스틱을 놓고 구장을 나옵니다.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냈습니다. 남편이 장갑을 벗으면서 쫓아옵니다. 종이컵에 따끈한 커피를 따랐습니다. 김이 하얗게 오릅니다. 비로소 어르신이 마스크를 벗습니다. 종이컵을 들고 후후 불어가며 커피를 조금씩 조금씩 마시는 어르신에게 남편이 물었습니다.

"오늘은 어디까지 갔다가 오셨어요?"
"저기 유람선 있는데 꺼정. 탄천꺼정 가려다가 관뒀다구."

"야아 걷기운동 많이 하셨네. 어젠 안 나오셨죠?"
"엉, 어젠 좀 춥더라구. 추우면 왼쪽 뒷머리가 시리면서 좀 이상하거든. 오늘두 며늘애가 집에만 있으라구 했는데 답답해서 나왔다구."

"며느님이 집에만 계시라구 하면 나오지 마세요."
"그래야 허는데 이눔의 맘이, 온전한 맘이 아니라서 말야."

어르신의 눈에는 어르신만의 갈대의 순정이 들어차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겨우 일 년밖에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어르신에게 '커피 더 드릴까요?'했고 커피를 다 마신 남편은 다시 장갑을 끼면서 구장으로 가버립니다.

나와 어르신은 보온병에 남아 있는 커피를 나누어 더 마십니다. 문득 어르신이 말했습니다.

"게이트볼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애."
"그럼요, 얼마든지 하실 수 있으세요. 우리 동네 노인회장님은 82세신데 게이트볼협회 고문이시고, 얼마나 잘 치시는지 몰라요. 젊은 사람들이 못 따라가요."

어르신은 키는 작아도 등이며 허리가 젊은 사람같이 꼿꼿합니다. 걸음걸이도 얼마나 빠른지를 모릅니다. 우리 구 대회 때 보면, 각 동네에서 모여든 게이트볼 회원들 중에는 칠십 대 어르신들도 많고 팔십 대 어르신들도 있습니다.

모두들 건강하고 활기차 보입니다. 어르신도 그들 못지않게 건강합니다. 얼마든지 게이트볼 운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운동도 하고 많은 사람들도 만나고, 친구가 하나도 없는 어르신에게는 안성맞춤인 것입니다.

"당최 걷기운동밖에 모르니까 아는 얼굴두 없구 심심해. 봄 되면 배워 볼까봐."
"그러세요,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이젠 계속 춥겄는 걸. 추우면 게이트볼 안하지?"
"네."

낼 모레인 22일 송년 경기가 끝나면 올해는 그만입니다. 둔치에 나올 일이 없습니다. 겨울 동안에는 경기도 없거니와 춥고 땅이 얼어붙고 특히 강바람이 세차게 불어 개인적으로 게이트볼 연습도 하러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걷기운동조차도 둔치에서 하지 않고 동네 울타리를 따라 돌아야만 합니다.

"나두 겨우 내내 걷기운동 못하지 뭐. 그럼 봄에나 보겄네. 궁금해서 어쩌나."

어르신의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저도요'하는 눈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22일에 게이트볼 경기가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겨울 동안엔 동네 울타리를 따라 도는 걷기운동을 할 거라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말동무가 아쉽고 그립고, 또 추우면 왼쪽 뒷머리가 시리면서 좀 이상하다는 어르신입니다. 행여라도 길이 미끄럽고 추운 날, 울타리를 따라 도는 우리 부부를 볼 겸해서 당신도 걷기운동을 한다고 밖으로 나오면 어쩌나 해서 입니다.

a 궁금해서 어쩌나

궁금해서 어쩌나 ⓒ 김관숙

a 그럼 봄에나 보겄네(제 모습입니다)

그럼 봄에나 보겄네(제 모습입니다) ⓒ 김관숙


어르신은 빈 컵을 내려놓고 다시 마스크를 썼습니다. 그런 뒤 부시럭대며 잠바주머니에서 인삼사탕 몇 개를 꺼내어 내 손에 쥐어 줍니다. 그 손이 아주 따뜻합니다. 어르신의 마음인 것입니다. 나는 얼른 사탕 한 개를 까서 입에 넣습니다. 그리고 일부러 방글 웃어 보입니다. 어르신은 그런 나를 마치 친동생을 보듯이 그렇게 사랑스런 눈으로 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놓았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어르신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등을 보이고 걸어가면서 손만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가 내립니다. 쓸쓸해 보입니다. 내 가슴 속까지 전해져 오는 것으로 보아 또 어르신 눈에 어르신만의 갈대의 순정이 어리는 모양입니다.

겨울이 그야말로 눈결에 아주 눈결에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봄이 와서 어르신이 스틱을 잡고 열심히 게이트볼을 배우다가 보면 친구들을 많이 사귀게 되어 재미있는 나날을 누리게 되고 또 자연히 어르신만의 갈대의 순정에 젖어드는 일도 줄게 될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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