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직접 연락을 오지는 않았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철담과 연락을 주고받았겠지."
"그럼 철담에게 전해들은 바도 없나?"
"그게 아주 모호하단 말일세. 내가 이 일련의 사건들이 그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었네. 철담에게는 자네들이 모르는, 또한 외부로 알려져서는 절대 안 되는 한 가지 수치스런 일이 있었네."
어렵사리 말을 던지는 운중보주를 보며 갑자기 중의가 나직하게 말했다.
"자네의 셋째 제자인 궁수유와의 관계 말이군."
"자네도 이미 알고 있었나?"
@BRI@밖으로 말이 새어나가는 것을 극히 꺼려하는 듯한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성곤이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철담에게 일어난 일을 두 사람은 아는데 내가 모르고 있었다니 나만 따돌림을 받은 기분이군. 자네야 그렇다 해도 잊을만하면 들르는 이 친구도 뭔가 알고 있었다니…. 하여간 도대체 수유 그 아이와 뭔 일이 있었다는 건가?"
"말하지 않은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게. 자네에게도 들추어내 말할 내용은 아니었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흉허물은 되도록 덮어주는 것이 친구의 도리다. 운중보주가 성곤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던졌다. 죽은 친구의 흉을 들추어내는 것 같아 마음이 찜찜하다는 기색이었다.
"철담 그 친구는 오래전부터 수유 그 아이에게 맹목적인 집착을 보였네. 한 사내로서 말이지. 그것으로 인해 그 이후 수유 그 아이는 빗나가기 시작했다네. 그럼에도 그 친구는 수유를 포기하지 않았지."
궁수유의 행실에 대해 나도는 소문은 성곤 역시 들은 적이 있었다. 허나 출신이 천궁문(天宮門)인지라 여염집 여자나 일반 가문의 여자와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 가볍게 치부했었다. 천궁문은 여자가 사내를 택하는 특이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허나 철담과 궁수유의 관계는 달랐다. 사제지간과 다름없는 두 사람의 관계는 만인으로부터 지탄을 받을 패륜(悖倫)이었다.
"어찌 그런 일이…? 도대체 자네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 우리 모두 낯짝을 들고 다니지 못하겠구먼."
"자네가 뭐라 해도 할 말이 없네. 하지만 어쩌겠나? 나 역시 이미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네. 수유 그 아이를 천궁문으로 돌려보낼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일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네. 결국 그저 말이 나가지 않도록 하고 모른 척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결론을 내렸지."
소문은 안으로 끌어안고 있는 것이 최상이다. 만약 궁수유를 천궁문으로 돌려보냈다면 일종의 파문인 셈. 그 이유가 명확해야 했다. 그러다 보면 닦달을 받은 궁수유가 나중에 어떤 말을 할는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럼 그것 때문에 철담 그 친구가 수유를 자네의 후계로 만들려 했단 말인가?"
"아마 그것이 문제였지 않을까 하네. 이미 수유와의 관계를 아는 나에게 대놓고 수유를 천거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철담이 내게 후계 문제에 대해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네. 물론 분명 그들에게서 연락이 왔겠지. 허나 그 문제에 관한 한 철담은 전혀 나에게 내색조차 하지 않았단 말일세."
아무리 만인에게 존경받을 만한 덕망과 지식을 갖춘 인물이라도 한순간 미망(迷妄)에 빠지면 올바른 판단과 선택을 하기 어렵다. 그동안 모든 이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그의 지식과 가치관은 단지 자신을 변명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이다. 또 가증스럽게도 그동안 쌓아올린 덕망이란 것 역시 그럴듯한 거짓말로 남들을 설복시키기 쉬운 가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특히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자들은, 그리고 그 맛에 중독되어 버린 자들은 그래서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다면 철담은 후계 문제에 있어 그들과 대립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겐가?"
성곤이 혼자 말을 하듯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단순히 후계 문제 때문에 철담을 살해할 이유가 있을까? 그렇다면 혈간마저 당한 것도 후계 문제라 해야 하는가 말일세."
운중보주 역시 확신할 수는 없다는 기색이었다. 다만 철담은 궁수유를, 혈간은 옥기룡을 후계자로 만들려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각자 나름대로 이런 사태에 대해 자신의 입장에서 정리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다 불쑥 성곤이 다시 중얼거렸다.
"그들은 누구를 후계자로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그야 막내인 추교학이겠지. 뜻밖에 자네가 이번 회갑연을 끝으로 후계를 정하고 무림에서 물러나겠다는 자네의 결심은 그들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돌발적인 변수였을 걸세. 그들에게 있어 자네의 후계문제는 확실히 매우 중요한 문제네. 그들로서는 또다시 번거로운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을 테니 말이네."
중의가 확신하듯 말하자 운중보주도 고개를 끄떡였다. 객관적으로 놓고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올 상황이었다.
"하여튼 나는 지금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일련의 사태가 그들이 아니라면 감히 누구든, 어느 곳이든 벌일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네. 최소 그들 전체가 아니라 해도 일부라도 움직인 것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네."
"으음…!"
신음이 절로 터져 나오는 말이었다. 반신반의하고는 있지만 운중보주의 생각을 절대적으로 부인할 수 없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말이었다. 운중보주가 말을 이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들 내부에 뭔가 일이 터진 것이 아닌가 하네. 그들 내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알력(軋轢)이 심해지면서 어느 쪽이든 먼저 손을 쓰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자네는 상만천이 불쑥 여기에 들어온 것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하겠군."
중의가 고개를 끄떡이며 말했다. 지금 상황으로만 놓고 본다면 운중보주의 생각이 가장 객관적이고 합리적이다. 그가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계속됨에도 더 적극적으로 나서 대응하지 않고 있는 것이 그러한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물론이네. 만약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철담이 죽었다는 소식이 결정적으로 그를 움직였다고 볼 수도 있네. 자네는 누구보다 상부호와 가까운 사이 아닌가?"
"한 번 알아보아야겠군. 그렇지 않아도 재보(財珤)는 나에게 급히 용추의 치료를 부탁해 왔네."
재보(財珤)란 몇몇 상만천과 가까운 인물들이 그를 부르는 별칭이었다. 하지만 그를 앞에 두고 재보라 부른 인물은 다섯 손가락 안이었고, 중의는 그 중 한 인물이었다.
"결국 신태감이 운중보에 온 것도 마찬가지라고 보아야겠지?"
성곤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끄떡이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운중… 저 친구의 예상이 맞는다면 그렇겠지. 헌데… 그런 신태감이 죽어버렸으니…, 그렇다면…?"
중의가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을 크게 치켜떴다. 그러자 성곤이 무거운 어조로 신음하듯이 말을 뱉었다.
"으음… 추산관 태감이 직접 들어올 수도 있겠군."
그 말에 세 사람의 표정이 또다시 어둡게 변했다. 운중보주 역시 신음을 뱉듯 중얼거렸다.
"나는 그것을 지켜볼 참이네. 만약 추산관 태감까지 이곳에 들어온다면 일은 정말 심각해지네. 결국 내가 추측하고 우려했던 일이 터지는 것이지."
"설마하니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날까?"
"아니길 바라야지."
대화를 잠시 멈춘 세 사람의 표정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변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요사이 정말 정신이 없습니다. 아침에 올린 줄 알고 지나치다가 지금에야 오마이뉴스에 와보고는 아직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기다리는 독자분들께 정말 죄송합니다. 무슨 말로 변명해야할지 모르겠군요. 한번 용서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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