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01회

등록 2006.12.27 08:12수정 2006.12.27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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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단 말이냐?"

옥청량의 목소리는 변해 있었다. 지금까지의 부드럽고 나직한 음성이 아니었다. 본래의 음성은 변하기 어려웠지만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섬뜩하게 만드는 냉랭함이 스며 있었다. 진삼은 움찔하며 대답했다.

"얼핏 보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르신께서는 잘 아시고 계신 분이었던 듯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옥청량은 진삼을 다그치고 있었다. 옥청량은 절박했다. 유일한 생존자다. 그에게서 조그만 단서라도 얻어내야 한다. 하지만 그저 주방에서 일하는 진삼이 아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행히 얼핏이라도 얼굴을 본 것은 혈간어른이 찾아 온 인물과 독대해 저녁을 같이 했기 때문이었고, 주방장인 진삼이 그 자리에 몇 번 들락거렸기 때문이었다.

"그가 언제 돌아 간지는 모르겠다고...?"

"그릇을 모두 내오고 차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지나 흉수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 사람이 언제 돌아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옥청량은 무겁게 신음을 흘렸다.

"으....음....맞군."

보주의 판단이 옳았다. 바로 그 놈이다. 형님과 잘 아는 그 놈이 형님의 척추를 갈라놓은 것이다. 형님이 흉수들에게 꼼짝없이 당하게 만들어 놓은 놈이다. 도대체 그 놈은 누구인가? 누구기에 형님이 등을 보일 정도로 믿었던 것일까?

"그 놈의 얼굴을 기억하겠느냐?"

"자세히는 보지 못했지만 특이한 외모라서 본다면 알아볼 수 있습니다."

진삼의 말에 옥청량의 눈빛이 반짝였다.

"특이한 외모?"

"말하는 것을 보아서는 분명 중원인이 맞는 것 같은데 외모는 매우 이국적이었습니다. 서역인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불빛에 비친 눈도 푸른빛인 것 같았습니다..."

"서역인(西域人) 같았다는 말이냐?"

"반드시 그렇다고 하기에도 좀... 여하튼 외모는 확실히 우리와 조금 달랐습니다."

누굴까? 특이한 외모... 더구나 벽안(碧眼)이라니... 옥청량은 자신이 알고 있는 인물들을 모조리 기억해 내려 애썼다. 두세 명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 했지만 가능성이 없었다. 도대체 자신이 모르는, 그러나 형님이 독대해 식사를 할 만큼 가까운 인물은 누굴까?

'동창 쪽 친분이 있었던 놈일까?'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으로 보아 흉수들은 동창의 비영조다. 더구나 동창에는 색목인들도 꽤 섞여 있는 편이었다. 그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왜 진삼(秦三)이 살아있음을 감추셨습니까? 어차피 알려질 일이고 이미 성곤어른께서는 눈치를 채신 것 같던데..."

대화가 끊기고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옥기룡의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옥청량은 자신의 생각에서 깨어나며 고개를 끄떡였다.

"과연 성곤께서는 알아보는 눈치더군. 하기야 서너 번 보았으니 기억 못할 리 없지. 하지만 알면서도 속아줄 것이고 네 사부 역시 이해하실 게다."

"꼭 그럴 필요가 있었습니까?"

"이제 이 운중보 안에서 믿을 사람은 피붙이 밖에 없다. 또 생각해 둔 바도 있고..."

옥청량은 피를 나눈 혈간의 시신을 보고 눈물을 흘린 이후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의 눈에는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미세한 살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형이기는 했지만 나이 차이가 십년 이상이 나는 관계로 조실부모한 그에게는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던 존재였다. 언제나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던 형이기도 했다. 그런 형의 시신을 확인하는 순간 지금껏 참고 있었던 분노가 그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곧 조문객들이 밀려 올 것이다. 진삼은 다른 사람들에게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휘장 뒤에 있도록 하거라. 다만 구멍을 뚫어 놓아 찾아오는 조문객은 반드시 진삼이 확인하도록 만들고..."

"도망 간 흉수 놈들이 설마 조문을 오겠습니까?"

"그 놈들이 아니라 그 놈들과 관련된 놈들은 반드시 찾아오겠지. 하지만 일이란 아무도 모른다. 네 말대로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에 하나 그 놈들이 이곳에 들어와 있다면 반드시 오게 될게야."

옥청량은 시선을 돌려 뒤쪽에 서있는 진삼을 보았다.

"조문객이 들어오면 잠깐이라도 시선 돌리는 일 없이 살펴보도록 해라. 특히 동창의 인물들이 온다면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진삼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옥청량의 눈빛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는 것 같았다. 그의 기억으로 셋째주인께서 저런 말투와 눈빛을 보인 적은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알겠습니다요. 주인어른."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 옥청량은 단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 역시 진삼의 귀 뜸에 개미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도록 준비하게. 그물에 걸린 고기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이곳 백호각을 벗어나면 우리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게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어른신...!"

이미 만반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것을 옥청량이 모를 리도 없고, 단혁 또한 내세울 바 못된다. 주의를 주면 아랫사람은 대답하면 되는 것이다. 단혁은 몸에 익힌 습성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단혁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옥기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숙부께서는 동창에서 저질렀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 놈들이 흉수라면 동창의 짓이다."

"저 놈들이 어디서 주워듣고 천마방의 역리라고 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숙부가 보기에 저 놈들은 분명 동창의 쓰레기들이다. 네 부친께 동창 비영조에 대해 급히 알아보라고 전갈을 보냈으니 내일 네 부친이 이곳에 당도할 때쯤이면 모든 것이 확실해 질게야."

"확신이 선다면 차라리 우리가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 어떨 런지요? 신태감이 죽은 이상 지금 동창에는 우리를 상대할만한 인물이 없습니다."

옥기룡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옥청량이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소리! 네가 동창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비영조는 공식적으로 동창에 존재하지 않는 조직이다. 간단하게 모른다고 해버리면 그만이다."

"안되면 불게 만들어야지요. 경후는 동창의 첩형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를 족쳐 안 될게 뭐 있습니까?"

옥기룡의 말에 옥청량은 혀를 찼다. 옥기룡은 뛰어난 인재임에는 틀림없지만 아직 완전히 익지 않았다. 젊다는 것은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충동에 치우쳐 성급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단점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쯧쯧.... 동창의 권세는 이미 하늘을 찌르고 있다. 구족(九族)이라도 멸문당하고 싶은 게냐? 더구나 이곳은 운중보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그를 납치한다 해도 다른 이목을 피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겠느냐?"

".........!"

"다행히 시간은 충분하다. 그들이 조문 온 다음에 움직여도 늦지 않아. 우선은 왜 동창이 형님을 노렸느냐는 것이지. 그것을 아는 것이 먼저다. 그 뒤에 반드시 형님에 대한 복수를 해도 해야지. 구족이 멸문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옥청량의 맑고 깊은 눈이 점점 얼음을 닮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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