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03회

등록 2006.12.29 08:22수정 2006.12.29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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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명분이 없는 자신들이 나서는 것보다는 백도가 나서주기를 바랐고, 그런다면 자신을 비롯한 교두들은 백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를 도우리라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생각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백도의 안하무인격의 태도에 분노한 마궁효로 인하여 처음부터 빗나가기 시작했지만 그 미련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반드시 이 사건의 조사에 대해 뛰어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사치스런 자신의 감정을 내세워 그가 해야 할 일에 차질을 빚어서는 안 되었다.

차라리 백도가 죽고 쇄금도가 살아있었다면 순조롭게 도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쇄금도는 백도의 눈치를 보면서도 어제까지 자신들과 많은 정보를 주고받으며 조사해오지 않았던가? 그런 쇄금도가 어처구니없게 계집을 끼고 뒹굴다 살해를 당했으니 자신들이 쇄금도와의 친분을 내세워 조사하기도 껄끄러운 형편이었다.

@BRI@"그렇지 않아도 그래 볼 생각도 있네. 허나 자네가 직접 조사하는 편이 나으리라 생각하네. 이 말은 자네가 마음을 돌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감정을 모두 버리고 도와줄 용의가 있다는 말이네."

지금 철호는 백도에게 최대한 양보하고 있었다. 다른 교두들의 백도에 대한 감정은 쉽사리 해결될 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철호는 웬일인지 백도를 움직이고자 하는 의도를 은연중에 내비치고 있었다. 허나 돌아오는 백도의 대답은 냉랭했다.

"숫자만 채운다고 되는 게 아니오."

순간 철호를 비롯한 교두들의 표정이 홱 변했다. 어찌 보면 흉수를 잡아내는 일이 어렵다고 표현한 것일지 몰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두들이 아무 쓸모없는 인물들이라는 말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왼쪽에 서 있던 인물의 주먹이 빠르게 백도의 왼쪽 턱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이 자식…, 정말 말로는 안 되는 자식이군."

말은 나중이었다. 주먹은 빠르게 백도의 왼쪽 턱에 닿고 있었다. 하지만 백도는 어느 틈엔가 팔을 구부려 팔뚝 뒤쪽을 약간 치켜들어 날아오는 주먹을 막는 것과 동시에 위로 비켜 올라가며 허공을 가르게 만들었다. 그러자 주먹을 휘두른 자의 상체가 백도에게 쏠림과 동시에 오른쪽 옆구리가 훤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허나 백도는 상대의 옆구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구부렸던 왼쪽 팔 관절을 회전축 삼아 밖으로 주먹을 돌리자 다가선 상대의 면상에 꽂혀가는 것이 아닌가? 아주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너무나 빠르고 적절한 대응이어서 무심코 공격했던 상대는 회전하며 내리 찍히는 듯한 백도의 주먹을 피하려 황급히 얼굴을 뒤로 젖혔다.

상대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백도의 시의적절한 공격에 당황할 만도 했지만 빠른 반격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붙는 백도의 공격권을 허리까지 활처럼 휘면서 벗어나더니 왼발로 백도의 사타구니를 향해 차올렸다. 상대 역시 빠르고 적절하게 공수를 조절하고 있었다.

"………!"

백도는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다른 자들도 공격해 올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주먹을 휘두른 자는 절대 무시할 인물이 아니었다. 뱀 같은 허리를 지녔다는 환영교수(幻影巧手) 반일봉(潘馹鳳)은 연공(軟功)의 대가이며 축골(縮骨)과 금나(擒拿)에 정통한 자였다. 그는 인간이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몸의 유연성과 움직임을 보여주는 인물로 이십 년 전부터 산동(山東) 삼대고수 중 하나로 알려진 인물이었다.

백도가 오른발을 들어올려 발바닥으로 사타구니를 차 오던 반일봉의 발을 노리고 내리찍어갔다. 발과 발이 잠시 스치는가 싶더니 곧바로 백도의 발바닥은 방향을 약간 비틀어 상대의 무릎 연골을 노리며 연속적으로 찍어갔다. 무릎 연골은 치명적인 부위다.

자칫 백도의 발바닥에 찍히면 무릎 아래와 위가 분리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반일봉의 다리가 흐물거리더니 마치 문어의 다리가 스르륵 말리는 것처럼 공격권에서 벗어나는 게 아닌가?

동시에 반일봉의 오른손 손바닥이 쫙 펴지며 허공에 교묘한 각도를 그렸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백도의 왼쪽 귀밑부분 풍지혈(風池穴)을 노린 공격이었는데 잡히면 왼쪽 몸 전체가 마비되는 대혈 중 하나였다. 바로 반일봉의 독문비기인 주련이십칠식(珠聯二十七式)의 금나수법(擒拿手法)이 펼쳐진 것이었다.

그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쾌속함과 방어하기 힘든 각도의 출수는 왜 그가 금나의 대가인지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백도 역시 방심하지 않고 처음으로 몸을 비스듬히 뉘이며 허공을 누비고 있는 현란한 수영(手影)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파파파----팍----!

허공에서 손과 주먹이 가볍게 마주치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두 사람 모두 전신 내력을 실지는 않았지만 자칫 잘못 맞으면 뼈라도 부러질 정도의 손속이었다.

"그만…!"

두 사람이 빠르게 손속을 교환하고 잠시 떨어졌다. 본격적으로 진력을 끌어올려 한바탕 할 자세였는데 옆에서 철호의 호통이 터졌다. 그는 호통과 함께 한걸음 나섰는데 더이상 두 사람이 드잡이질을 한다면 손을 쓰겠다는 태도로 보였다. 백도의 검미 끝이 슬쩍 올라갔다.

"아무래도 사부가 가시는 저승길에 편안히 가시라고 모시고 갈 자의 피라도 뿌려야 하는 모양이군."

백도가 양 주먹을 말아 쥐며 우두둑 소리를 냈다. 그의 전신에서 차가운 기세가 흘러나왔다. 그의 시선은 철호를 비롯한 교두들을 쭉 훑고 있었는데 누구를 막론하고 언제든지 덤벼보라는 당당한 태도였다. 철호가 반일봉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철담어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곳 아닌가? 어찌 그리 성급하신가?"

언짢은 표정이었다. 반일봉은 얼굴에 불만을 가득 담고 있었지만 한 발짝 물러난 채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철호가 백도에게 시선을 돌렸다.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지? 그렇지 않아도 자네는 뭔가 있어."

광나한은 깊은 인내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가 왜 운중보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조사하고자 하는지는 몰라도 다른 교두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할 인내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허나 참고 있는 가운데서도 듣는 사람에게는 영 거슬리는 비꼬는 말투였다. 말을 던졌음에도 시선을 고정한 채 여전히 백도가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이해하지 못했지. 왜 철담어른께서 대제자인 자네를 마다하고 쇄금도에게 기대를 걸었는지 말이야. 그게 이상했는데 철담어른이 잘못 보신 것은 아니었어."

주먹을 들고 싸우지 않는 것뿐이지 싸우는 것보다 더 비위를 거스르는 말이었다. 백도의 감정을 충동질 쳐 먼저 손을 쓰게 하려는 의도일지도 몰랐다. 아니라면 백도의 감정을 거슬려 뭔가 캐내려는 의도가 있는지도 몰랐다.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소."

경고였다. 무심한 표정의 백도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 보이는 묘한 구석이 있었다. 지금은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하는 살벌함이 느껴졌다. 더구나 백도의 태도는 철호로 하여금 기분이 갑자기 나빠질 만큼 당당했다.

자신을 포함한 네 명 모두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한결같이 절정의 고수들이다. 아무리 믿는 구석이 있다 해도 자신들을 아주 얕잡아 보지 않는다면 취하지 못할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누가 감히 그들 네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저리 조금도 위축됨이 없는 모습을 보일까? 오히려 백도는 지금까지 당신들이 시비를 걸었으나 이제 더는 참지 않겠다는 모습같이 보였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광나한이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세 가지 이유 중 하나겠지."

참아야 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은 저 자식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

"하나는 이미 흉수가 누군지 알고 있지만 자네로서는 건들 수 없는 존재라서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

"푸웃--!"

그 말에 백도는 실소를 터트렸다. 그의 얼굴에는 미세하나마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올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내년에 다시 뵙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올 애독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내년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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