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여자친구를 만나 행복했습니다

[나만의 특종] 친구 결혼식장에서 만난 그녀, 변한 건 없었습니다

등록 2006.12.27 14:08수정 2006.12.27 14:3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예전 여자친구를 '결혼식'에서 만났다.

말 그대로다. 예전에 오랫동안 사귀었던 여자친구를 결혼식장에서 만났다. 그렇다고 오해하진 말기를. 나의 결혼식도, 예전 여자친구의 결혼식도 아닌, 친구의 결혼식에서 만났다.

a

결혼 전 찍은 웨딩 사진 ⓒ 심진영

올해 11월 4일. 내 절친한 친구가 결혼을 했다. 대학시절부터 한 4년 가까이 사귀었나? 친구에게서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건, 결혼 하기 1달 전이었다.

친구들이 결혼하라고 찔러도 그냥 히죽히죽 웃던 녀석이 갑자기 결혼 발표를 했다. 그것도 결혼식 1달 전에 말이다. 사고를 쳐서 결혼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어이없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했다.

옛 여자친구를 만나면 어쩌지?

하지만 이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생겼다. 그것은 다름아닌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 무슨 소리인고 하니, 결혼한 친구는 내가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의 친구와 결혼을 했다. 즉 나와 예전 여자친구가 두 사람의 다리를 놓아준 셈이다.

'결혼식장에 분명히 예전 여자친구는 올텐데, 그러면 마주칠텐데. 마주치면 뭐라고 말을 하지? 잘 지내냐고? 아님 오랜만이라고? 아니야 그냥 모른 체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한숨만 나왔다. 친구의 결혼식은 축하해줄 일이지만 개인적으로 나에겐 조금 무거운 짐이 생긴 셈이었다.

@BRI@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일요일, 친구는 자신이 살 물건이 있다고 같이 백화점에 가자고 했다. 나야 할 일 없는 대학교 4학년 취업준비생. 친구가 점심 사준다는 말에 한걸음에 뛰어갔다. 밥에는 장사 없다. 특히 돈 없는 취업준비생에겐.

친구는 백화점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고르더니, 나에게 양복을 해주고 싶단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했더니, 내 덕분에 좋은 사람 만났기에 좋은 옷 하나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결혼 준비하느라 돈도 많이 쓸텐데, 나는 괜찮으니깐 니 와이프나 챙겨'라는 내 완곡한 거절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난 양복을 한 벌 받게 되었다. 친구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돌아오는 길에 히죽히죽 웃었다. 면접 보려면 양복 하나는 필요했는데, 잘됐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런 마음도 잠시, 그날 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구 : "환주야, 양복 맘에 들어?"
나 : "완전 고맙다. 이런 거까지 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고마워."
친구 :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 우리 사이에... 근데, 내가 부탁할 게 있어."
나 : "응, 말해. 뭔데?"
친구 : "다름이 아니라 내 결혼식에 니가 사회를 좀 봐줬으면 해서."
나 : "엥, 뭐라고? 내가? 아니, 저기... 그게 말이야..."
친구 : "니가 꼭 좀 해줬으면 해. 알았지? 그럼 승낙한 걸로 알고 있을게."


결혼식장에서 사회를 보다

a

결혼식장 사진 ⓒ 허성

창졸지간에 나는 친구의 결혼식 사회를 보게 되었다. 그것도 예전 여자친구가 오는 자리에, 아직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도 하지 못한 사이에 사회까지 맡게 되었다.

'이걸 어쩐다. 친구에게 도저히 안 된다고 말해?'

그러자니 친구가 사준 양복이 울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어쩐지 양복 사준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결혼식 당일. 나는 결국 사회를 보게 되었다. 결혼식이 열리는 곳은 00회관. 엄청 넓고 잘 꾸며져 있었다. 그렇게 잘 꾸며진 결혼식장을 보니 머리도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결혼식 사회를 처음 봐서인지, 아님 옛 여자친구를 보게 될 거라는 걱정 때문이었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난 결혼식장 중심에 섰다. 긴장감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실수 속출, 초년병 결혼식 사회자

a

초보 사회자, 등줄기에 땀이 난다. ⓒ 허성

"장내에 계신 내빈분들께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오니 내빈 여러분께서는 식장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이 멘트를 시작으로 난 거의 정신을 놓았다. 정말 무아지경에 빠졌다. 식순을 미리 받아서 보고 또 보았지만 머리 속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러니 결혼식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있나.

처음엔 그럭저럭 잘해나갔다. 주례 소개까진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주례 소개 이후였다. 신랑을 입장시켜야 했었는데 난 그만 그것을 잊고 주례 선생님의 주례사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나 : "주례 선생님 입장이 있겠습니다. 000 선생님은 30년간 교육계에 몸을 담으셨으며 현재 저술, 후진 양성 등에 힘쓰고 계십니다. 박수로 맞아주십시오."
주례 선생님 : "반갑습니다."
나 : ...
주례 선생님 :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나 : (왜 그러냐는 얼굴로)...
주례 선생님 : 으흠... 어흠...
나 : (놀라서 입만 뻥긋 거리면서) (왜요? 뭐요?)
주례 선생님 : (마이크를 막고 먼 산을 바라보시면서 최대한 저음의 목소리로) 신랑 입장. 신랑 입장.
나 : (당황하면서) 신랑 입장이 있겠습니다.


식장 주위는 술렁거리고 식은땀은 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당황, 놀람이 범벅이 되어 내 머리는 새하얗게 타버렸다. 20초 정도 되는 그 순간이 나에겐 20년과도 같았다.

a

'퇴장' 대신 '입장' 을 외쳐 장내는 웃음으로 가득했다 ⓒ 허성

주례 선생님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를 넘기고 결혼식은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사고는 또 터지고 말았다. 주례사도 잘 마치고 양가 부모님께 인사하는 것도 다 끝난 나는 겨우 안도의 숨을 쉬면서 끝났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안이함이 또 다시 실수를 불렀다. 모든 식순이 끝나고 신랑신부의 퇴장만이 남겨졌다.

나 : "이제 두 남녀가 새로운 시작을 하는 힘찬 발걸음이 있겠습니다. 내빈 여러분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하는 두 남녀의 퇴장에 힘찬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그럼 신랑 신부의 퇴장이 있겠습니다."
나 : "신랑 신부 입장!"


일순간 결혼식장에는 환호와 박수 대신에 웃음이 가득했다. 난 내가 '퇴장' 대신 '입장'이라고 말한 것도 모르고 사람들이 왜 웃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다 신랑의 입에서 '퇴장, 퇴장'이라는 모양을 읽고서야 내가 퇴장 대신 입장을 외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그것도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을 옛 여자친구 앞에서.

결국 난 내빈분들께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신랑 신부 퇴장'을 외쳤다. 정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난 사회자. 식이 끝날 때까지 어디도 가지 못했다.

그렇게 결혼식이 끝났다. 뭐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말이다. 신랑은 나에게 잘했다고 말해줬지만, 그놈의 눈은 싸늘하기 그지 없었다. '이거 참. 양복 다시 달라고 하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가게 하는 눈빛이었다.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옛 여자친구

결혼식 이후 폐백이 진행되었다. 친구들과 나는 신랑 신부의 한복 입은 모습이 궁금해 폐백실로 갔다. 폐백실로 가는 복도길. 거기에서 그녀를 만났다. 변한 건 없었다.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우리의 관계는 변해 있었다.

'무슨 말을 할까? 평범하게 인사를 할까, 잘 지냈냐고? 아니야, 그냥 손만 흔들까?'

a

신랑 신부의 행복한 사진. ⓒ 허성

그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내 머리를 오고 갔다. 하지만 결국 난 말을 붙이기는커녕 아는 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녀를 그냥 지나쳤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내 성격일까. 모르겠다.

하지만 결혼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마침 그녀와 같이 지하철을 탔다. 우리는 많은 대화를 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어떻게 지내는지, 뭘 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잘 지낸다는 그녀의 말이 반가웠다.

어렵게 그녀와 이야기를 시작했고 짧지만 귀한 대화를 나눴다. 친구의 결혼식에서 만난 옛 여자친구.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해서 체면도 구겨지고 망신도 당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옛 여자친구가 내가 생각하는 모습 그대로인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덧붙이는 글 | '2006, 나만의 특종' 공모 기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2006, 나만의 특종' 공모 기사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자식 '신불자' 만드는 부모들... "집 나올 때 인감과 통장 챙겼다"
  2. 2 10년 만에 8개 발전소... 1115명이 돈도 안 받고 만든 기적
  3. 3 김흥국 "'좌파 해병' 있다는 거, 나도 처음 알았다"
  4. 4 23만명 동의 윤 대통령 탄핵안, 법사위로 넘어갔다
  5. 5 김건희 여사 연루설과 해병대 훈련... 의심스럽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