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가스를 잠갔겠지"

너무 낮게 설치된 도시가스 밸브가 아이들이 장난감이 되고 있다

등록 2006.12.27 18:04수정 2006.12.2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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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를 나갔던 남편이 집으로 오는 시간은 대중 잡아 7시 전후이다. 물론 정해진 퇴근시간이 따로 없으니 가끔은 저녁 노을을 짊어지고 오기도 하고, 가끔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찌개를 두번 세번 데워가며 대문을 쳐다봐도 올 생각도 않다가 9시가 넘어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막 저녁을 먹으려고 하면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애먼 국냄비뿐만 아니라, 방바닥도 본의 아니게 호강을 하며 후끈후끈 해진다. 낡을 대로 낡은 보일러는 온수라도 쓸라치면 한 시간 전부터 미리 달궈놔야만 한다. 그런데 어제 일찍 저녁을 해놓고 남편 오는 시간에 맞춰 보일러를 돌린다고 돌리는데, 가동된 지 십분도 지나지 않아 비맞은 모기불처럼 스르르 꺼져버리며 '점검' 등에 불이 들어와 버렸다.

노처녀 시집가려면 등창난다고 집 사놓고 이제 이사날짜만 잘 맞춰서 나가면 되건만 사년 동안 잔고장 한번 없이 잘 돌아가던 보일러가 왜 하필 이 시점에 고장이 난단 말인가.

보일러 통에 적힌 서비스센터로 전화를 해보니 국번이 두 자리인 그 전화번호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집을 인수하면서 주인아줌마가 일러준 말이 떠올랐다. 점검에 불이 들어오면 냉각수가 없어서 그러니 밸브를 돌려 냉각수를 채워주면 된다는 그 말에 냉각수 밸브를 돌리니 과연 냉각수는 한참을 들어가고서야 밑으로 흘러내렸다.

다시 보일러를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 여전히 보일러는 묵묵부답! 퇴근시간이 다 됐는데도 영 돌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창 좁은 보일러실에서 낑낑대며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 남편이 들어왔다.

"뭐해?"
"이게 붕붕거리더니 기어이 고장이 나버렸나봐! 어떡하지? 주인한테 전화해서 바꿔달라고 해야겠어!"
"당장 씻어야 되는데, 언제 바꾸냐? 그러지말고 잠깐만 있어봐."


남편은 집 앞에 있는 보일러가게에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 남편은 혼자 몸으로 덜렁허니 돌아온 것이다.

"왜?"
"아저씨가 출장 수리 나갔다네!"


그리고 남편은 다시 좁디 좁은 보일러실에 머리를 처박고는 애먼 보일러를 툭툭 쳐보기도 하고, 전원을 켰다 껐다를 반복해 보지만 보일러는 영 맥을 추지 못한 채 남편과 나의 애타는 속을 비웃고 있었다.

그때 남편이 나를 돌아보며 하는 말,

"가스불은 들어오지?"
"그럼! 밥이랑 국도 끓였는데."
"혹시 모르니까 한번 켜봐."
"들어온다는데 귀찮게."

툴툴거리며 부억으로 나와서 가스불을 켜는데, 방금 전까지 화력을 자랑하며 밥을 태우던 그 불빛이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여보 이상해! 가스불이 안 들어와!"

남편은 그제서야 "그러면 보일러가 문제가 아니라, 가스가 문제네"라고 했다. 차가운 방에서 자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남편의 먼지 가득한 머리가 더 눈에 들어왔다.

"그러지 말고 윗집에 전화 한번 해봐!"

전화를 해보니 윗집은 보리차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고 했다.

그럴 리가? 내가 영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를 주니까 윗집 언니는 끓고 있는 주전자 가까이 전화기를 대서는 생생한 보글거림을 들려주기까지 했다.

"그럼 뭐가 문제일까?"

나의 물음에 윗집언니는 더 어이가 없어했다.

"그건 내가 모르지. 누가 가스를 잠갔나보다."
"가스를? 가스도 잠글 수 있어?"
"그럼! 가끔 애들이 지나가다가 잠가!"

남편과 후레쉬를 들고 부랴부랴 일층으로 내려가서 선을 따라 훑어내린뒤 보니 역시나 우리집으로 들어오는 가스밸브가 잠겨 있었다.

손닿는 위치에 있는 도시가스 밸브
손닿는 위치에 있는 도시가스 밸브주경심

남편을 밑에 세워두고 집으로 뛰어와 가스를 켜보니 "화르륵" 불이 피어났다. 창문을 열어 "여보 불 들어왔어!" 고함을 질러 다시 문명의 혜택을 받게 됨을 온몸으로 기뻐했다. 집으로 들어온 남편은 "애들이 장난칠만 하드라. 그렇게 낮게 설치를 해 놓으니까 애들이 지나가다가 잠궈버리지"라며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자칫하면 대형사고로 연결될 수도 있는 도시가스 밸브가 너무 낮게 설치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들에게 손 닿는 위치에 설치된 가스밸브는 위험천만한 물건이 아니라 누르고 도망가는 벨처럼 그저 장난감 정도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런 것도 흔히 말하는 안전불감증이겠지?

아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창문을 내다보게 된다. 밸브를 잠그는 아이라도 잡아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은 없다. 단지 "니가 장난삼아 잠근 밸브에 한 가족은 겨울밤을 떨면서 보내야 한다"며 이솝우화를 인용해서라도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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