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왕산에서 2007년을 품에 안다

강원도 정선 가리왕산으로 2007년 새해 일출을 보러가다

등록 2007.01.01 19:52수정 2007.01.0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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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 일출, 장엄하다. ⓒ 강기희

@BRI@갈왕이 머물렀다는 전설이 깃든 가리왕산은 강원도 정선에 있다. 작은 지리산이라 할 만큼 그 품이 넉넉하여 품어 주는 것들도 많다. 산짐승들의 표효소리가 끊이지 않고 각종 나물이 지천인 가리왕산은 정선 사람들에겐 어머니의 산과 같다.

2007년 새해 첫날 새벽에 눈을 떴다. 새벽 3시다. 밖은 어둠뿐이다. 일출을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가리왕산의 높이가 1561m나 되니 산책 삼아 나설 일도 아니다. 읍내에 있는 이선생 내외가 차를 몰고 왔다. 집을 떠나 함께 산행을 할 일행들과 만나기로한 다래뜰 마을로 간다.

타고간 차를 세워두고 봉고차로 갈아탄다. 가리왕산 휴양림까지는 차로 이동한다. 일행은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이고 다들 가리왕산 자락에 사는 이들이다. 도시에서 온 이들이 다섯이고 정선 토박이는 둘이다.

새벽 4시, 작은 불빛을 앞세우고 야간 산행을 시작한다. 사위는 어둠뿐이다. 하늘엔 별이 총총하다. 별을 셀 여유도 없다. 계곡의 물소리가 발걸음을 따라온다. 근처에 계곡이 있다는 건 짐작뿐 어디에 있는지 확인은 안된다. 출발부터 급경사다. 잠도 부족한 데다 연일 마신 술로 인해 몸은 천근만근이다. 작은 불빛에 의지한 산행은 극도로 긴장을 준다.

자칫 발을 헛딛거나 얼음에 미끄러지면 낭떨어지로 굴러 떨어진다. 신경이 예민해진다. 급경사는 사람의 숨을 턱까지 차오르게 한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혼자 돌아가기에도 만만치 않은 야간산행이다.

시작부터 급경사를 만난 탓에 다들 힘들어하는 기색이다. 입을 다물고 묵묵히 올라간다. 땀이 목덜미로 흐른다. 답답함에 장갑을 벗는다. 두터운 점퍼가 몸을 칭칭 감는 듯하다.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신음소리가 절로 나는 길이다. 쉬었다 갔으면 좋으련만 선행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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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걷히는 가리왕산, 나를 앞서간 이들이다. ⓒ 강기희

잠시 다리쉼을 한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북두칠성이 절반만 보인다. 2006년의 마지막 밤을 밝혀주던 달빛은 사그러진 지 오래다. 계곡 물소리가 시원하다. 풍덩 빠지고 싶은 유혹이 이는 새벽이다.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나 때문에 뒤에 오던 이들의 걸음이 느려진다.

그렇게 30분 정도 올랐을까, 선행자가 쉬었다 가자며 걸음을 멈춘다. 나는 그 자리에 드러눕는다. 등으로 축축한 기운이 감돈다. 땀이 밴 옷은 탈수 전의 빨래 같다. 사방을 구분하지 못하니 여기가 어디쯤인지도 알 길이 없다. 얼마나 왔느냐 물어본다. 시작이란다. 눈 앞이 캄캄하다.

다시 산행은 시작된다. 몇 걸음 떼어놓자 땀이 비오 듯한다. 무슨 땀을 그리 흘리냐고 한다. 낸들 아는가. 부실한 몸 탓이라 둘러댄다. 고개 하나를 넘는다. 선행자는 내리막으로 길을 잡는다. 얼음이 깔린 길은 내려가는 것도 힘겹다.

한참을 내려가니 계곡이 나온다. 계곡엔 얼음이 깔려 있다. 손을 담그지도 못한 채 계곡을 지난다. 다시 오르막길이다. 선행자는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잘 찾아간다. 길은 다행히 눈은 없다. 올라가는 길이 양지편이라 한다.

한 시간 정도 걸었다. 쉬었다 가자는 말이 가장 반갑다. 바닥에 드러누워 밤 하늘을 올려다 본다. 땀을 흘리고 나니 하품이 나며 잠이 밀려온다. 이대로 한숨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젖은 옷이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얼어간다. 잠들었다간 새해 첫날 비명횡사할 정도다.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킨다.

일행들이 뭔가 먹고 가자며 준비한 것들을 꺼낸다. 초콜릿을 내게 내민다. 산행할 때 힘을 내게하는 음식이란다. 그 말에 초콜릿 하나를 우적우적 먹는다. 물통의 물은 이미 얼었는지 얼음이 서걱거린다. 얼음을 입안으로 털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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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 주목, 주목나무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을 간다. ⓒ 강기희

새해 첫날의 풍경치고는 기가 막히다. 곤한 잠에 떨어져 있을 시간에 이런 평화라니. 1000m 지점을 지나니 눈이 깔려 있다. 여기서부터 두 시간은 가야한 단다. 다리 힘이 더 빠진다. 일출을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는 선행자의 말에 다시 힘을 내본다.

선행자와의 간격이 점점 멀어진다. 등산객들이 낸 눈길은 아예 빙판이다. 무슨 신발이 그리도 미끄러운지 미끄러지기 일쑤다. 할 수 없이 발목까지 빠지는 눈밭으로 간다. 출발할 때의 길은 차라리 양반이다. 새해 소망을 비는 일 따윈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더듬거리며 눈밭을 걷는다. 이런 모습을 화면으로 지켜본다면 멋있어 보일 테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선두는 보이지도 않는다. 차라리 내 걸음으로 가자.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편하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소중한 날이다.

넘어지는 일도 혼자라 좋다. 두어 번 구르다 다시 올라가면 그만이다. 눈밭에 드러누워 지난 한 해를 생각한다. 열심히 살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나 후회도 많다. 마무리 하지 못한 일들도 마음에 걸린다.

산 아래에서 사람 소리가 난다. 그들은 곧 나를 추월한다. 남자가 셋, 여자가 셋이다. 천안에서 왔단다. 그들의 걸음은 매우 빠르다. 그들을 따라가던 나는 그들마저 놓친다. 신발에 아이젠을 한 이들을 따라가려 했던 내가 한심스러워 홀로 풀썩 웃는다.

날이 서서히 밝아 오기 시작한다.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주변이 훤해진다. 이제야 살 것 같다. 여기가 어디 쯤인가 짐작도 된다. 1980년 여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나는 친구들과 가리왕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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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에서 바라본 설경, 정상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 ⓒ 강기희

가리왕산에 약초를 캐러가자는 친구의 말에 선뜻 응했다가 가리왕산에서 3박4일을 지냈다. 당시 캔 약초는 시호, 세신, 반하 등이었다. 그러나 첫날부터 비가 오는 통에 우리는 꼬박 사흘을 심마니들이 지어 놓은 움막에서 보냈다.

하룻밤 자고 하산할 예정이었던 우리는 먹을 것마저 떨어졌고 라면 하나로 한 끼를 때워야 했다. 산을 오를 때 캔 더덕은 간식꺼리도 되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밤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그쳤다.

구름이 발 아래로 깔렸다. 구름을 밟고 걸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고픔도 잊고 구름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신비롭다는 말이 그때에나 쓰여질 말 같았다. 잠시 후 바람이 불었다. 발 아래 깔려있던 구름이 서서히 밀려갔다. 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다음 날 가리왕산을 내려오면서는 하늘이 노랗다는 말을 실감했다. 파란 하늘이 노란 하늘로 보였다. 가리왕산 아래 마을에 살던 친구집을 무작정 들어가서 밥 좀 해달라고 했다. 염치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친구 어머니는 우선 허기라도 채우라며 미숫가루를 곰솥 가득 타주었다. 네 명이서 게눈 감추듯 그걸 비웠다. 나와 가리왕산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하늘이 노랗다는 생각을 하며 산을 내려갔던 그 길에 나는 27년 만에 다시 섰다. 감회랄 것은 없지만 기분은 묘했다.

다시 걸음을 떼었다. 오늘만이라도 해가 늦게 떠주길 바라면서 눈밭을 걸었다. 경사는 완만했지만 눈길을 걷는 일은 힘들기만 했다. 몇 사람이 또 나를 앞서갔다. 함께 가자는 말도 못하고 고이 보내준다. 조금 더 올라가니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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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 정상, 새해를 함께 맞은 이들이다. 다들 행복하길. ⓒ 강기희

15분 거리에 정상이 있단다. 하지만 내 걸음으로는 30분은 족히 걸릴 터이다. 정상까지 가면서 두어 번 넘어진다. 온 몸이 욱씬 거려온다. 참아야 했다. 정상은 아무에게 허락하는 게 아니지 않던가. 바람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바람은 다행히 등 뒤에서 불었다. 바람의 도움을 받으며 정상으로 올라간다.

가리왕산 정상은 제를 지내는 돌무더기와 표지석밖에 없다. 그러나 주변 산들을 품어주는 넉넉한 품은 가히 일품이다. 불어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펼쳐진 산을 둘러본다. 아름답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출을 보기 위해 정상을 밟은 이들은 50여 명 된다. 올라오는 길이 달라 정상에서 마주친 이들이 많다. 뒷산 오르듯 출발한 나의 엉성한 차림에 비해 다들 중무장을 했다.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비는 여성의 모습도 눈에 띈다.

나도 간절한 소망 하나 빌어야 하지만 정상까지 오는 동안 머릿속이 텅 비었다. 다 버렸는데 뭘 채워야 한단 말인가. 빌어도 빌어도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을 소망이라고 하기엔 우습다. 빈 마음을 그대로 둔 채 해가 뜨기만 기다린다.

"해 뜰 시간이 지났습니다. 구름에 가려 올라오지 않네요. 그만 내려갑시다."

함께간 이들이 하산길을 재촉한다. 추위를 견디기에도 쉽지 않은 날씨긴 했다. 일행이 먼저 길을 떠난다. 그들을 서둘러 따라가다 뒤로 넘어진다. 이번엔 제대로 넘어졌다. 어깨와 팔에 통증이 심하게 온다. 잠시 누워 몸 상태를 점검한다. 걸을 수는 있겠다 싶다. 몸을 일으켜 앞선 이들을 따라간다.

내리막 길에서 몇 번 더 넘어진다. 몸이 만신창이가 된다. 다른 이들은 잘 가는 길을 나만 넘어지는 일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눈밭으로 들어선다. 눈이 무릎을 덮는다. 혼자라면 콧노래 부르며 갈 길이지만 일행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가는 일이 급선무다. 빨리 가자.

정상 바로 아래에서 일행들이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에다 넘어진 내 몰골은 그들을 웃기게 했다. 멎쩍은 일이었지만 나도 크게 웃었다. 새해 첫 웃음이다. 그러나 정상을 밟고 난 후의 여유스러운 웃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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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 눈길, 저 길에서도 나는 넘어지기 일쑤였다. ⓒ 강기희

라면에다 소주 한 잔을 곁들였다. 정상에서 바람 때문에 하지 못했던 "위하여"를 했다. 술을 들이키는데 해가 떠올랐다. 구름 사이로 올라오는 2007년의 새해 첫날의 태양은 장엄했다.

"일출이야!"

일출을 바라보는 일행들의 얼굴빛이 환해졌다. 정상에서 빌지 못했던 소망 하나씩을 하늘로 던졌다. 장가 못간 총각들에겐 결혼 소식을 보내라는 덕담도 이어졌다. 가리왕산 자락을 품어주는 새해 첫날의 일출은 분명 다른 날 바라보는 태양과는 달랐다.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민 태양은 늦게 떠올라 미안하다는 듯 아름답고 선연한 빛을 만들어주었다. 커피 한잔의 여유까지 누린 일행은 가리왕산 중봉을 거쳐 하산을 했다. 무릎 통증이 심했던 나는 하산길에서도 그들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고, 먼저 내려간 이들을 오래 기다리게 했다.

하산길에 내 신발이 유난히 미끄러운 이유에 대해 물었다. 눈길이든 산길이든 이렇게까지 힘들게 걸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람쥐는 아니더라도 남들 만큼은 했던 나였다.

"그건 등산화가 아니고 안전화라고 하는 신발이여."
"잉, 안전화? 그게 뭔데?"
"그건 건설 현장에서 신는 신발이여."
"난 이게 등산화인줄 알고 신었는데?"
"끌끌, 생긴 건 흡사하지만 아녀."

일행의 말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먼저 나왔다. 시골집에 살면서 전 주인이 남기고 간 신발을 등산화라고 신고 왔으니 내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일행의 말을 듣고 보니 자주 넘어진 이유가 분명해진다. 겨울 등산화를 두고도 그런 고생을 했으니 누굴 탓할 입장도 아니었다.

출발지에 도착하니 정각 12시다. 8시간의 산행으로 몸은 땀냄새로 가득했다. 오늘 걸은 거리는 13km가 넘는다고 했다. 평지도 아닌 길을 그렇게 걸은 일이 대견스럽다. 후둘거리는 다리를 질질 끌고 집으로 돌아오니 개들이 반갑다며 새해 인사를 한다.

"그래, 고마워. 너희들도 올해는 제발 올무에 걸리지 마라. 응?"

개들에게 한 덕담이 오늘 유일한 소망이 되고 말았다. 음력을 계산하는 어머니는 오늘이 새해 첫날인 줄도 모르니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온 몸이 파김치다. 새해 첫날 몸을 너무 혹사한 것은 아닌가 싶다.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힘차게 2007년을 보낼 것 같다. 새해 들어 쓰는 첫 기사다. 이 글을 읽어주는 이들에게 새해 인사를 보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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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고팠다. 라면조차도 행복했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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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 일출, 구름 사이로 내민 새해 첫날의 일출이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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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왕산 일출, 불 덩어리 하나가 가슴에 들어왔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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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해야, 올해도 늘 우리에게 희망이 되어다오. ⓒ 강기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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