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07회

등록 2007.01.05 09:09수정 2007.01.0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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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보주였나?"

상만천이 미간을 좁히며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중얼거렸다. 중의가 품속에서 침을 꺼내 용추의 등에 침을 꽂기 시작했다. 크기와 굵기가 다양한 침은 빠르게 용추의 등을 덮고 머리와 허리까지 그 범위를 넓혔다.


"단정 짓지 말게… 반나절을 같이 있었지만 아직 이렇다 할만한 사실은 찾아낼 수 없었네."

"보주는 무서운 사람이오."

"운중에 대해 나보다 많이 아는 사람은 없네. 나만큼 그를 아는 인물이 있다면 오직 성곤 뿐이지."

중의의 손놀림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대혈(大穴)에 장침을 꽂으면서도 망설임이 없었다. 어느새 백지장 같았던 용추의 살결이 울긋불긋하게 변해가기 시작했다. 막혀있던 기혈이 빠르게 요동치고 있다는 증거였다.

상만천은 반박하지 않았다. 철담과 혈간이 죽은 이상 운중보주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은 중의의 말마따나 중의와 성곤이었다. 물론 지금도 자신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아직 단정 짓기에는 시기적으로 너무 이른 감이 있었다.


"나라고 물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네만… 회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이윽고 침을 다 놓은 듯 중의가 손놀림을 멈추며 지나가듯 물었다. 되도록 간섭이나 개입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주지 않으려는 조심스럽다는 말투였다. 상만천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생각하는 듯 했지만 그는 물끄러미 중의의 등을 바라보다가 결심을 굳힌 듯 가볍게 탄식을 불어내며 입을 열었다.


"휴우… 물이 고이면 썩는다고 본회는 그동안 너무나 안정적이었소. 인간이란 존재는 수시로 적을 만들어 싸우려는 이상한 버릇을 가지고 있어 평화로움에 대해 금방 권태를 느끼곤 하오. 외부의 적이 있을 때면 동료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우정과 단결력도 시간이 지나 외부의 적이 사라지고 평화로움이 지속되면 권태가 찾아들면서 내부에서마저 서로의 적을 만드는 못된 버릇 말이오."

사실 대답할 의무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중의가 물어서는 안 될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상만천이 대답을 하기 위해 장황하게 서론을 끄집어내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본래 품자 형을 이루는 다리 세 개가 모두 있다면 아주 안정적이지만 하나만 사라져도 솥(鼎)을 세우지 못한다. 지금 그 중 하나가 사라졌고, 회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아니 어쩌면 하나의 다리가 사라지기 전부터 회는 외부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불안정하게 흔들거렸는지 모른다.

"어느 때부터인가 회 내에서 서로간의 의견이 갈라지고 불협화음이 일기 시작했소. 물론 겉으로 대놓고 대립한 것은 아니었소. 자신들의 속내를 감추고 적정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으로 불안한 안정이 지속되었다고 보면 될 것이오.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쌓여가고 있는 상황이었소. 그러다 결국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것이 운중보의 후계문제였소. 보주가 물러난다고 한 그 때부터 지금까지 수면 밑에서 끓던 물이 밖으로 끓어 넘치게 된 것이오."

"그럼 삼 개월 전부터였단 말이로군."

"보주가 물러나겠다고 공표한 것은 어쩌면 회에서 바라던 바였을지 모르오. 사실 회에서도 형님을 비롯한 동정오우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기엔 오래전부터 껄끄러울 정도로 동정오우의 존재는 너무 컸소. 그것을 철담께서 적절하게 조절하기는 했지만 동정오우… 특히 보주는 껄끄러운 존재임에는 분명했소."

부담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깊은 사정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중원무림은 운중보주의 말 한마디에 움직일 수 있는 곳이었다. 보주의 뜻이 그렇든 아니든 간에 운중보주의 이름으로 떨어지는 것이라면 그렇게 움직여 왔던 곳이 무림이었다.

"회의 내부인물로 운중보의 후계를 잇게 하는 것이 안정적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쪽은 추태감이었소. 회로서는 현 보주와 같이 껄끄러운 존재를 또 다시 만드는 우를 두 번 범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소."

"자신의 자식인 추교학을 차기 운중보주로 만들고 싶었던 게로군."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나 모두 짐작하고 있듯 본래부터 그러한 목적으로 추교학을 보주의 제자로 들여보낸 것이었다.

"물론 속내야 뻔히 들여다보인 일이었지만 어떻든 반드시 틀린 주장은 아니었소. 철담께서 동조했다면 그렇게 결정되었을지도 모르오. 허나 철담께서는 아주 모호한 태도를 보였소. 은근히 추태감의 의견에 동조하는 듯 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좀 더 신중하자는 의견과 함께 결정을 뒤로 미루기만 했소."

"궁수유… 그 아이 때문이었겠지."

"물론 그 아이가 걸리기도 했겠지만 뭔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는 듯 보였소. 처음에는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혈간이나 운중보주의 의견을 적절히 조절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았소. 철담께서는 내 의견에도 동조하는 듯했으니 말이오."

"자네 의견…? 자네는 당연히 추태감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단 말인가?"

지금까지 상만천은 회에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고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내세워 일을 처리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의견을 사전에 적절하게 조율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만들어 이익을 보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내세워 다툼을 하지 않고 누군가의 의견에 동조해 이득을 취해왔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적을 만들지 않는 방법이었고, 거래를 본업으로 하는 상인이 취하는 적합한 방법이었다.

"동조할 수 없었소. 나는 지금도 추교학이 후계를 잇는다면 회 내부의 혼란은 물론 이 중원이 시산혈해로 변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가지고 있소."

"그 우려는 이십칠 년 전 운중을 보주로 추대되는 때도 나온 적이 있었지."

"그 때와는 또 다르오. 나보주는 분명한 명분이 있었소. 형님을 비롯한 동정오우 내에서도 인정했고, 무엇보다 무림에서 전적으로 나보주를 원하고 있었소. 나보주가 아니라면 안 될 그런 상황이었단 말이오."

"……!"

중의는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용추의 등에서 침을 빼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오. 누가 후계를 잇든 문제는 발생하게 되어 있소.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파와 문파간의 대립, 세력과 세력간의 대립이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 아니오? 더구나 추교학이라면 운중보 존립자체도 어려울 것이오."

"장문위라면 어떨까?"

"그것이 소제의 생각이었소. 어차피 지금까지 안고 있는 문제를 또 다시 연장하는 것이지만 내부 분열과 그로 인해 흘릴 피를 최소화 시키는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소. 철담께서 후계문제에 있어 자신의 의견을 뚜렷하게 내세우지 못했던 것도 궁수유 문제만이 아니라 이런 여러 가지 생각 때문이 아니었나 하오. 혈간께서는 아예 회의 의견을 무시했소. 이미 회에서 자제하라는 전갈을 보냈음에도 조카인 옥기룡을 후계로 만들겠다고 대놓고 공표했소. 혈간의 성격으로 보아 그렇게까지 나선 이상 그의 고집을 꺾을 사람이 어디 있소?"

중의는 부항단지를 꺼내 준비를 하다가 혈간에 대한 말이 나오자 동작을 멈췄다. 잠시 망설이는 듯 하더니 물었다.

"그 때문에 회에서 혈간을 제거한 겐가?"

중의의 말투에서 냉랭한 느낌이 감돌았다. 상만천은 멈칫했다. 능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회에서는 그런 결정을 한 적이 없소."

"그렇다면 동창 단독으로 손을 썼다는 겐가?"

재차 파고드는 중의의 질문에 상만천은 가볍게 탄식을 내뱉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오. 소제 역시 이해하기 어렵소."

긍정이었다. 중의는 고개를 뒤로 돌려 힐끗 상만천을 보았다가 다시 부항단지를 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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