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08회

등록 2007.01.08 09:28수정 2007.01.0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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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점심을 신태감과 같이했소. 식사를 하면서 슬쩍 떠보았지만 신태감은 모르는 듯했소. 헌데 갑자기 오후에 신태감으로부터 전갈이 왔소. 문제가 발생했다고 말이오."

유등을 사용해 빠르게 불을 붙인 후 용추의 등에 부항(附缸)단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마치 조그만 호로병처럼 생긴 부항단지는 자기로 만든 것 같았다. 시술이 급해서인지 중의는 말이 없었다.


"동창의 비영조가 혈간을 기습했다는 전갈이었소. 허나 자신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고 말이오. 그런 명을 내릴 사람이라면 추산관 태감뿐인데 아직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으니 추후 더 조사해 알려주겠다고 했고, 혈간께서 불행한 일을 당했다면 아주 복잡한 문제가 될 것 같다는 내용을 덧붙였소. 또한 일단 혈간의 문제는 저녁에 나보주가 알고 있는지 알아보고 후계문제 역시 마음을 떠보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소."

"운중 그 친구의 생각처럼 추태감이 직접 명을 내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군."

"나보주도 역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소? 역시 모든 일은 나보주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군."

"무슨 뜻인가?"

"소제는 이 모든 사건의 흉수가 나보주라 지목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오.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분명 나보주가 웅크리고 있을 것이오. 우왕좌왕 하고 있는 우리 꼴을 비웃으며 말이오."


중의가 얼마 안지나 용추의 등에 붙인 부항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붉게 달아오른 원형의 자국에는 시커먼 피가 엉킨 채 솟아올라 있었고 부항단지에까지 핏덩이가 묻어 있었다.

"자네는 여전히 단정적이군. 혈간을 동창에서 기습해 죽인 일 역시 운중 그 친구가 시켰다고 할 텐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리 운중보주라 해도 추산관 태감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허나 상만천은 오히려 더욱 확신하고 있다는 듯 말했다.


"바로 그것이오. 나보주는 치밀한 계산으로 자신의 손보다는 타인의 손을 빌려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오. 들어 보시오. 나보주는 회가 내부적으로 곪기 시작해 계기만 주어지면 터질 순간에 결정적으로 후계문제를 던졌고, 그의 예상대로 그 문제로 인해 회는 겉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소.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나보주가 후계를 정한 후에 무림을 떠나겠다는 말이었소. 언뜻 생각하기엔 당연한 말 같지만 만약 다른 의도가 있다면 회 전체와 무림을 피바다로 만들려는 정말 무서운 계략이 아닐 수 없소."

중의는 대답 없이 깨끗한 천으로 용추의 등과 부항단지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나보주가 무림을 떠나겠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상황이 혼란스럽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오. 추교학이 후계를 잇게 된다 해도 나보주가 사오년 정도 뒤를 봐주면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을 것이오. 장문위나 옥기룡의 경우에는 일이년 만이면 깨끗할 것이오. 후계를 누가 잇든 문제는 발생할 테지만 나보주가 후사를 봐주면 대놓고 혈사를 일으킬 곳은 없소."

"시기적으로 공교롭기는 하군."

"과연 그 정도겠소? 나보주는 지금 제가 말씀드린 내용 정도는 이미 알고도 남을 거요. 그럼에도 자신은 철담을 살해한 흉수로 지목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애써 방관자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소. 그리고는 도대체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조차하지 못할 천둥벌거숭이 풍철한과 본 회에 극도로 감정이 안 좋은 함곡을 내세워 조사를 시키고 있소. 교묘하게 더욱 혼란을 가중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말이오."

상만천은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의 생각과 말을 부인하기엔 지금의 상황과 아주 적절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어 중의는 더 이상 친구를 두둔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역시 마음 한 구석에는 친구에 대한 의혹이 씻겨나가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 운중 그 친구가 과거 어느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면 지금 이러한 혈사(血事)를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그렇다면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그 생각만 하면 자신도 모르게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하지만 운중 그 친구는 그 일을 절대 알지 못할 터였다. 정말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재보… 나는 말이네…."

부항으로 뽑아낸 죽은 피를 꼼꼼하게 닦아내고 남아있는 침마저 용추의 등에서 모두 뽑아냈다. 그리고 엎드린 자세의 용추의 몸을 앞으로 돌려 바로 뉘였다.

"갑자기 자네가 이 모든 사건을 꾸민 흉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고개를 돌려 상만천에게 시선을 던진 중의의 시선과 뜻밖의 말에 상만천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핫… 정말 재미있는 농을 하시는구려. 하하핫…."

얼굴에는 이미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부인할 필요도 없다는 모습이었다. 허나 중의는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상만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농담이 아닐세."

중의가 정말 정색을 하고 말하자 상만천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들었다. 장난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그 이유나 들어봅시다."

"자네가 운중을 흉수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네. 나는 갑자기 이곳에 들어와서 바보가 된 기분이네. 지금 닥친 상황은 너무나 교묘해서 누가 흉수인지 전혀 알 수가 없네. 이런 능력을 가진 인물은 그리 많지 않지. 운중도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자네 역시 충분한 능력이 있네."

"본 회의 규칙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이오?"

"더 솔직하게 말할까? 자네는 욕심이 많지. 아니 욕심이라기보다는 언제나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정열과 패기를 가지고 있지. 자네의 강인한 의지와 인내심은 언제나 나를 감탄하게 만드네."

비난인가? 아니면 칭찬인가?

"자네는 상계에서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 그렇다면 자네 성격으로는 또 다른 무엇을 추구하려 할게야. 상계가 아닌 다른 쪽 말이지. 사실 자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비영조를 움직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 아닌가? 또한 운중보 내부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모든 것을 알려주는 자네의 눈과 귀는 철담의 시해도 가능했을 것이고... 사인은 심인검이지만 자네는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에게 심인검을 익히게 만들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은가?"

중의의 말이 계속될수록 상만천의 얼굴은 더욱 딱딱하게 굳어갔다. 중의의 지적은 예리했고, 사실 여부를 떠나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중의는 자신의 성격을 꿰뚫어 보는 인물 중의 하나였고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충동적이지만 그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어떠한 일을 처리함에 있어 선입견은 무조건 버려야 할 첫 번째 덕목이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아 조그만 실마리도 놓치는 경우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 닥친 상황처럼 황당한 일은 처음이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자 누구에게나 모든 가능성이 있게 되는 지금의 상황 말이네."

중의의 말에 상만천은 이를 꽉 물었다. 자신은 깨닫고 있지 못했지만 그의 턱 근육이 씰룩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흉수는 한 명이 아닐지 모르지. 분명 누군가가 이 사건들을 터트리기 시작하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다른 자들이 그것을 이용해 더 큰 사건을 벌이고 있는지도 몰라. 물론 자네가 흉수가 아니라면 이 사건을 이용하는 그 중 한명은 분명 자네일 터이고…."

정말… 상만천은 정말 자신이 형님이라 생각해 왔던 세 인물 중 하나인 중의를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상만천은 인내심이 깊은 인물이었다. 그는 절대 충동에 사로잡혀 우발적인 사건을 저지르는 바보는 아니다. 상만천의 충동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중의는 한마디 덧붙였다.

"어쨌든 귀산노인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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