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불빛이 내 눈 속으로 빠르게 지나가요"

아들과 함께 KTX를 타고 부산에 가다

등록 2007.01.09 10:24수정 2007.01.09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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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오전 7시, 겨울의 일요일 아침치고는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아들과 일어나기로 약속한 시간이라서 아들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였다.

"재윤아! 아빠랑 KTX 타러 가야지."


아빠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들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런데 눈은 아직 뜨지도 못하고 아빠 쪽을 바라본다. 며칠 전부터 KTX 탈 날만 손꼽더니, 잠결에도 KTX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깬 모양이었다.

아들과 아빠는 세수를 하고 간단히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섰다. 날이 갑자기 추워진 탓에 목도리에 장갑까지 완전 무장한 채로.

@BRI@사실 이번 부산행은 아들과 한 약속이자, 아빠 자신과 한 약속의 첫 번째 실행이다. 약속이란 것이 대단한 것은 아니고, 가족들과 여행을 많이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길은 너무 춥고 장거리라 2살 난 딸과 아내는 빼고, KTX 타는 것을 학수고대하던 아들과 동행하게 된 것이었다.

날이 추워서 여행을 연기할까도 했지만 처음부터 앞으로 더 많은 핑곗거리를 만들게 될 거 같아 무조건 가기로 했다.

집에서 차를 몰고 광명역으로 갔다. 광명역 주차장은 종일 주차가 5천원이다. 부산을 당일치기로 갔다 오는 동안 주차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a 아들에게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KTX 처음 탄 기념일.

아들에게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KTX 처음 탄 기념일. ⓒ 이경운

우선 광명역 앞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안으로 들어가 표를 사고 KTX를 기다렸다. 아들은 기다리는 20여 분 동안 "KTX가 언제 오냐"고 20번은 물어본 것 같다. 그러니 부산행 KTX의 등장이 아들을 얼마나 놀랍고, 황홀하게 만들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부터는 아들의 본격적인 KTX 즐기기가 시작됐다. 출발해서 얼마나 지났을까. 아들의 난데없는 말.


"아빠, KTX 정말 빠르지요? 그런데 불빛이 내 눈 속에서도 빠르게 지나가요. 신기하지요?"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KTX가 터널을 지나는 동안 터널 안의 불빛들이 무척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불빛들이 창에 비친 아들의 눈동자에도 똑같은 속도로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창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에 노란 불빛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아들은 한참을 그렇게 창 밖을 내다봤다. 빠르게 지나가는 집들과 나무들, 그리고 반대방향으로 지나는 KTX의 속도에 놀라기도 하고, 저 아래 철로에 무궁화나 새마을호 열차가 느리게 지나가는 것을 보며 다시 한번 KTX의 빠름에 감탄도 하면서 말이다.

아빠와 아들이 나란히 앉아 아침 햇살을 받고 잠에서 깨는 세상을 조용히 감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간식을 파는 이동판매대가 지나간다.

아들은 눈이 반짝이더니 오징어 하나를 덥석 집어든다. 그러면 그렇지 이걸 그냥 보낼 아들이 아니다. 어쨌거나 3시간을 가자면 지루할 테니 간식도 아들의 지루함을 조금 지연을 시켜줄 터이니 무한으로 제공해 주기로 했다.

이렇게 간식과 5살에 맞는 온갖 대화로 아들과 아빠는 부산역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아들이 지루함을 느낄 사이가 없었으니 일단은 성공이었다.

아들과 아빠는 짧은 일정 때문에 부산의 남포동과 자갈치시장, 그리고 태종대를 가보기로 했다. 물론 거의 아빠의 주장에 아들이 동의한 결과지만, 시간 관계상 해운대며 기타 여러 곳은 포기하기로 했다.

사실 이번 여행은 부산보다는 KTX 승차의 체험이 우선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들은 별로 부산에서의 일정에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

남포동→완당만두집→자갈치시장→태종대→상해거리, 그리고 집으로...

a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남포동입니다. 오늘만큼은 아들이 주인공 입니다.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남포동입니다. 오늘만큼은 아들이 주인공 입니다. ⓒ 이경운

남포동의 입구에 도착했다. 역시 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영화거리라서 그런가 극장이 많다. 극장과 함께 늘 있는 노점과 많은 음식점들. 아들과 남포동 여기저기를 기웃기웃 걸어다녔다. 물론 빼놓을 수 없는 증거, 기념사진도 몇 장 찍었다.

a 완당만두가 참 맛있었습니다. 면발도 쫄깃하고, 국물이 일품이었습니다.

완당만두가 참 맛있었습니다. 면발도 쫄깃하고, 국물이 일품이었습니다. ⓒ 이경운

오전 11시가 넘어가자 아들과 아빠는 본능적으로 배고픔을 느꼈다. 부산에서 유명하다는 완당만두집을 찾아 나섰다. 사전에 후배에게 물어봐서 위치는 파악해 놓은 바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만두와 면을 반반씩 섞은 메뉴 2개를 주문했다. 평소 아들 녀석의 식성이면 능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완당만두는 모양부터가 특이했다. 모양은 해파리 모양이다. 마치 국물 속에서 하늘하늘 유형을 하는 듯하다. 국물은 말할 수 없이 단백하고 시원했다. 전날 술 한 잔 했더라면 제대로 해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은 만두가 별로인 모양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유부초밥을 하나 더 시켰다. 맛있었다. 그런데 아빠는 완당만두 두 그릇에 배가 빵빵해졌다. 그래도 유명한 부산의 별미를 원 없이 먹었으니 기분은 좋았다.

단지 배가 너무 불러 점심의 두 번째 메뉴로 생각했던 밀면을 먹어보지 못하게 된 것은 안타까웠다. 사실 완당만두 먹고 밀면을 더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음, 좀 과한가? 밀면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a 자갈치시장 옆 생선 좌판은 아들이 신기해 하는 것들 뿐이었습니다.

자갈치시장 옆 생선 좌판은 아들이 신기해 하는 것들 뿐이었습니다. ⓒ 이경운

남포동 건너에 새로 지은 자갈치시장이 있었다. 현대식 건물. 그런데 왠지 정이 안 가는 느낌이다. 왁자지껄한 자갈치시장을 기대했는데…. 현대식 건물에 들어가기 전에 아들과 건물 옆의 생선 좌판들을 구경했다. 엄청난 생선들에 아들은 다시 한 번 놀라고 즐거워했다. 생선에 대한 질문도 많아졌다. 붐비는 시장만 아니었어도 천천히 더 재미있게 둘러볼 수도 있었는데, 그래도 재미있었다.

a 아들말대로 탈출한 문어 입니다. 한참을 지켜보며 웃었습니다.

아들말대로 탈출한 문어 입니다. 한참을 지켜보며 웃었습니다. ⓒ 이경운

좌판을 둘러보는 중에 문어 한 마리가 대야를 탈출해 길가로 재빨리 기어 나왔다. 아들은 배꼽이 빠져라 웃어댔다.

"아빠, 문어가 탈출했어!"

아빠도 웃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문어 녀석, 주인아저씨한테 미움을 받지 말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인 지어진 자갈치시장은 보기에는 좋았지만 건물 안은 조금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옛것이나 사람 냄새 나는 것은 항상 없어지고 나면 후회되고 그리워지는 것일까. 왁자지껄하며 유명한 자갈치시장의 참모습을 아들에게 보여주지 못한 게 아쉽다.

a 현대식 자갈치시장은 왠지 낯설어 보입니다. 그래도 기념으로 한 장 찍었습니다.

현대식 자갈치시장은 왠지 낯설어 보입니다. 그래도 기념으로 한 장 찍었습니다. ⓒ 이경운

태종대에는 아들이 좋아하는 관람열차가 있었다. 서울대공원에 가도 늘 코끼리열차를 고집하는 아들은 역시 관람열차를 타고 신이 났다. 멀리 일본땅까지 보인다는 전망대는 날이 흐려서인지 거의 보이지 않고, 아들의 신나는 관람열차 탑승으로 태종대 관광을 마쳤다.

부산역으로 돌아가는 길, 아들과 아빠는 버스를 탔다. 아들은 미취학 아동으로 공짜, 아빠는 1천원. 우와 돈 벌었다. 택시 탔으면 1만원은 족히 나왔을 텐데….

영도를 빠져나오며 때, 가능하면 다리가 하늘로 향했던 옛 영도다리를 보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아들이 그 모습을 봤다면, "아빠, 다리가 올라가! 신기하죠?" 하면서 좋아했을 텐데 말이다.

a 부산역 근처 상해거리도 중국풍의 멋스러운 곳입니다. 부산에서 꼭 가볼만한 곳입니다.

부산역 근처 상해거리도 중국풍의 멋스러운 곳입니다. 부산에서 꼭 가볼만한 곳입니다. ⓒ 이경운

버스를 타고 왔는데도 부산역까지 몇 분이 안 걸렸다. KTX를 탈 시간도 남고 해서 부산역 가까이 있는 상해거리를 찾았다. 중국음식점들이 많아 분위기가 제법 차이나타운 같다. 영화 올드보이의 무대였다고도 하고, 예전에 역 부근에 발달했던 텍사스촌이었다고도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에는 아들과 함께 이곳에 와 맛있는 중국 음식들을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부산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아들과 다시 부산역으로 빨려 들어갔다. 예약해 놓은 표를 받기 위해 표 사는 곳으로 갔다. 어라,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들과 아빠는 앞뒤좌석으로 자리가 나누어져 있었다. 이거야 원. 그것도 역방향. 대략 난감이었다.

아빠는 아들에게 절대 떠들거나 옆자리 사람 괴롭히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고, 역에서 파는 경주빵까지 사주며 설명을 했다. 일단 이해했다는 아들의 대답을 듣고 열차에 몸을 실었다.

a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아마 탈출한 문어꿈을 꾸고 있을 듯합니다.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아마 탈출한 문어꿈을 꾸고 있을 듯합니다. ⓒ 이경운

그런데 아들은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타자마자 취침이었다. 휴∼ 아들의 인내력을 잘 아는 아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아들은 광명역까지 한 번 깨지도 않고 왔다. 배고프면 먹겠다는 경주빵도 그대로 둔 채로.

집에 도착했다. 엄마와 동생이 반갑게 아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대략 30분 가까이 잘 기억도 나지 않는 KTX와 부산에 대한 기억을 아들은 쉬지도 않고 쏟아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두서가 없지만, 엄마에게 쉴새 없이 설명하는 아들의 모습에서 이번 KTX를 타고 떠난 부산여행이 아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럼, 다음에는 어디를 가야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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