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뒷골목에서 문화를 만나다

[창이 있는 풍경 38] 낙산 - 이화동

등록 2007.01.12 14:26수정 2007.01.1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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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족과 연인'. 조금만 발품을 팔면 산 병풍 안에 자리잡고서 북적대는 서울 중심을 내려다볼 수 있다.

'가족과 연인'. 조금만 발품을 팔면 산 병풍 안에 자리잡고서 북적대는 서울 중심을 내려다볼 수 있다. ⓒ 박태신

동숭동 주택가를 지나면 낙산 공원이 위쪽에 있고 그 아래 종로구 일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책로가 놓여 있습니다. 이곳에서 보면 북악산, 인왕산, 남산이 훤히 보입니다. 저쪽 인왕산 아래 옥인동, 누상동 꼭대기 동네에 가면 이곳 낙산이 보이겠지요.

이 길에도 작품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가족과 연인'입니다. 난간에 작품을 고정시켜 놨습니다. 벤치 작품도 있습니다. 이름하여 '전망을 위한 벤치'. 거리 곳곳에는 간이 안내표지판이 앙증맞게 그려져 세워져 있습니다. 달팽이 그림은 '천천히 가라'는 뜻입니다. 강아지가 응가 하는 그림은 '목줄+봉투+장갑'이라는 문구와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바람 따라 흔들거리는 철봉에 매달린 작품도 있습니다. 아니 철봉까지 작품인가요. 작품 '가방 든 남자'의 빨간 구두와 빨간 가방이 인상적입니다.

청룡천이라는 약수터가 있습니다. 샘물이 나오는지 조금은 의심스럽습니다. 그 근처에서 아까부터 저처럼 사진을 찍던 신사가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저보고 미술과 관계된 일을 하냐고 묻더군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고 하니 그 신사도 자신을 소개하며 명함을 건넵니다.

세상에! 알고 보니 이 '낙산 프로젝트'를 총지휘한 이태호 예술감독이었습니다. 이런 우연한 만남을 갖게 되다니. 감독님은 날씨 좋은 날, 만들어놓은 작품들을 사진에 담아두려 나온 길이었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인터뷰 아닌 인터뷰가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앞에 있던 청룡천에 대해서도 알게 됐습니다. 예전에는 볼품없는 약수터였는데, 이번 행사 때 이곳도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름하여 '빨래터가 있는 우물'입니다. 그 옆에 노후한 돌담에는 수묵화가 그려져 있는데 짙은 돌담 색과 잘 어울립니다.

낙산 프로젝트 총지휘자를 만나다


a '야 신난다'. 이런 상상을 하다니. 창만 있던 벽에 미술가의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창이 고마워할 것 같다.

'야 신난다'. 이런 상상을 하다니. 창만 있던 벽에 미술가의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창이 고마워할 것 같다. ⓒ 박태신

주민들의 동의하에 벽화 작업이 이루어졌겠다고 하니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어느 집은 깨끗하게 하얀색 칠을 해서 그려달라고 했답니다. 제가 보니 그렇게 한 집도 있지만, 자연스레 현장을 살리면서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화가들이 무척 탐을 낸 큼지막한 벽면을 지닌 몇몇 집은 주인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답니다. 이상한 그림을 그리거나 또는 아주 현실적인 문제 즉 재개발 계획에 차질이 생길까 봐서요. 감독님이나 저는 재개발이 되지 않았으면 하지만요.


이렇게 여러 집들의 벽면을 선정하여 여러 미술가들에게 분담했고, 그들의 아이디어들이 벽 위에 심어졌습니다. 또 두 군데 계단길에도 그림을 그려 놓았습니다. '숫자가 있는 계단길'과 '꽃계단'이 그것입니다. 직접 와서 보십시오. 숫자가 날아다니고 꽃이 누워 있습니다.

후일담이지만 이태호 감독은 숫자 계단에다 기형도의 시 같은 것을 칸칸이 써 놓은 '시 계단'을 구상했으나 작가들이 반대했다고 하더군요.

계단길 위에는 전깃줄이 거미줄처럼 쳐져 있습니다. 달동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싫지는 않습니다.

구상은 했으나 하지 못한 일도 있었습니다. 감독님은 개인 주택이나 빌라 벽에 직선으로 돌아다니는 가스 파이프에 눈이 가더랍니다. 이 파이프에 무지개색 같은 색으로 색칠해 두면 어떨까 했답니다.

붉은색으로 통일되어 있는, 벽 위에 떠있는 가스파이프는 일률적이지 않고 집 모양새에 따라 그 설치 노선이 다양합니다. 그런 색칠이 가해지면 붉은색의 음습한 분위기가 산뜻하게 바뀔 것은 당연합니다. 언제가 실행에 옮겨지면 좋겠습니다.

발길은 경로당으로 향했습니다. 구립 '이화 경로당'입니다. 이곳에도 여러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작품이 있거든요. 녹물이 흘러내리던 담벽에다 할아버지 할머니 오래 사시라고 십장생 그림을 그려놓았고, 평상과 차양막도 해드렸답니다.

만남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사실들을 여럿 알게 됩니다. 많은 설명을 듣고서 이쯤에서 감독님과 헤어졌습니다. 우연치고 행운 같은 만남이었습니다.

낙산 일대의 대명사라 할 굴다리를 지납니다. 이곳에도 작품들이 '모여' 있습니다. 공동 작품입니다. 주민들과 학생들의 타일 그림 작품들이 굴다리 밑에 붉은색 톤과 푸른 색 톤으로 모여 있습니다.

작품들 중에는 벽체로 벽면에 붙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기술적인 문제가 궁금해졌습니다. 돌판을 돌담에 붙일 때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는지 같은… 실제로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동안 작품 설치를 위해서 용접도 이루어지고, 기중기가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외관이 화려한 '미화 이발관'

a '자작나무 숲'. 멋진 옷을 입었으니 한겨울에도 춥지 않겠다.

'자작나무 숲'. 멋진 옷을 입었으니 한겨울에도 춥지 않겠다. ⓒ 박태신

이제 내리막길입니다. 저만치 컨테이너 박스가 자작나무 그림을 옷입고서 있습니다. 창틀도 자작나무 숲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맞은편 벽에는 봉제인과 재봉틀 그림이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예전에 이곳 주변에 재봉사들의 일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걸 연상시키는 그림입니다.

a 정선 구절리에서 만난 자작나무 미니 숲.

정선 구절리에서 만난 자작나무 미니 숲. ⓒ 박태신

이제 이곳 이화동의 명물을 마지막으로 볼 차례입니다. '낙산 프로젝트'와 상관이 없는, 정말 외관이 화려한 이발소입니다. '미화 이발관'입니다. 남자 손님들을 미용실에 빼앗기는 시대에 굳굳하게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a '미화 이발관'. 자부심 강한 이발사 아저씨의 멋진 포트폴리오.

'미화 이발관'. 자부심 강한 이발사 아저씨의 멋진 포트폴리오. ⓒ 박태신

왼쪽에 '모질 및 모발연구소'라는 문안이 있습니다. '기술본위', '기술의 창조', 'HAIR CENTA' 등의 문구가 창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玉不之無光'이라는 문구가 궁금증을 유발합니다. 문을 열고 물어볼 걸 그랬습니다.

아하! 그리고 이 이발소의 커피 자판기를 이용해 보십시오. 점심을 근처에서 해결하고 이곳에서 커피를 뽑아 먹었는데 아주 맛있었습니다.

'낙산 프로젝트'의 미술작품들은 서울사대부여중의 뒷길 벽을 따라서도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낙산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작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멋진 산책이 될 것은 분명하고요.

이 프로젝트의 취지는 '소외지역 생활환경 개선을 위한 공공미술사업'입니다. 사업의 기대효과 중 이런 항목이 있었습니다. '지역적인 문화코드를 반영한 에코(탈)박물관 개념을 실현'. 이곳 낙산에 조성된 미술작품은 그 취지에 맞게 설치된 것 같습니다. 프로젝트의 성공이라고 할까요.

이곳의 아이들에게도 미술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회도 될 것이고요. 공공미술이란 개념은 조금은 낯선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점점 더 늘어났으면 하고 바라마지 않습니다.

동네를 세 번 둘러보았습니다. 처음에 놓친 작품도 새로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번잡한 대학로의 중심가를 잠시만 벗어나 이 뒤쪽의 '문화'를 맛보십시오. 아참! 쇳대박물관 옆에 이 프로젝트의 안내소인 노랑컨테이너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팸플릿 얻어다가 산책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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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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