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군 한센인 공동생활시설인 성심원의 주선으로 11일 '서울 나들이'에 나선 한센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점심식사를 마친 뒤 남산 서울타워로 향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남소연
한센인으로 산다는 것
가장 발걸음이 빨라진 곳은 남산 전망대와 명동성당 기념품 가게. 야광 묵주, 십자가 메달, 팔찌까지 성심원에서는 눈에 안 들어오던 것들이 엄청 많다. 임 팀장이 '쏜다'고 해서 8000원짜리 흰색 면사포를 하나 샀다. 10000원 이상으로는 안 된다는 으름장에 팔찌는 만지작거리다 말았다.
세레나(69·여)는 쌈짓돈을 꺼내 팔찌를 하나 샀지만, 내가 그럴 돈이 어디 있나. 매달 성심원에서 나오는 용돈 4만5천원은 아끼고 아끼다, 오랜만에 만나는 동생을 위해 2주 전 파마하는 데 썼다. 남은 것은 오다가 동생 주려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곶감 한 상자 사는 데 썼다.
지금이야 서울이 '나들이의 도시'지만, 내게 서울은 '생존의 도시'였다. 13살 터울의 막내 동생을 자식처럼 키우느라 손가락이 휘도록 일해야 했다.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14살 때 한센병을 앓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21살 되던 해 가족들을 두고 집을 나왔다. 병이야 참으면 그만이지만, 부모님과 네 형제들(일찍 작고한 언니 한 명과 남동생 두 명, 여동생 한 명)을 두고 나올 때 가장 힘들었다.
그 뒤로 1~2년에 한 번씩 집에 들렀다. 남의 집 부엌일, 농사일 등을 해서 번 돈으로 집에 들르면 철모르는 동생들은 누나가 사온 사과를 들고 물었다. "엄마, 이거 먹으면 우리도 병 옮아?" 피붙이들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이니, 세상 사람들의 편견은 말하기 싫을 정도로 나에게 모질었다.
6년 만에 집에 들렀더니 동생들은 고아가 돼 있었다. 부모님은 화병으로 1년 간격을 두고 차례대로 돌아가셨다. 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막내 동생은 작은 집에 맡겨져 있었다. 어린 것이 얼마나 일을 많이 하고 구박받고 살았던지, 누나가 찾아갔는데 벽에 붙어 꼼짝하지 않았다.
동생을 데리고 나와 아는 사람을 통해 서울로 보냈다. 열심히 뒷바라지해 동생 공부도 시키고 장가도 보냈다. 지금은 서울에서 한복집을 하는 올케와 살고 있다. 동생은 서울에서 같이 살자고 보채지만, 한센병 후유증으로 뼈 골절이 잦은데다 이미 네 번이나 수술해야 할 정도로 왼쪽 다리의 끊어진 신경이 말썽을 부려 병원행이 잦다. 동생 내외에게 짐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