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이 선생님이 되었어요!

춘천 꾸러기어린이도서관 겨울방학이야기

등록 2007.01.12 16:25수정 2007.01.1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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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마술 수업

마술 수업 ⓒ 이선미

"얘들아, 아줌마가 숫자를 맞추어 볼 테니까 1부터 60까지의 숫자 중에 한 숫자를 생각해봐!"

아이들이 웅성거린다. 몇 분 후에 대표로 병석이가 일어났다. 병석이는 이경우(꾸러기어린이도서관 사서자원활동가)씨 뒤편에서 아이들에게 자신이 적은 숫자 '39'를 보여주었다. 아이들은 무언의 동의를 하고는 입을 꽁꽁 닫고, 말똥말똥 이경우씨를 쳐다보았다.

@BRI@"에이, 엉터리일 거야. 설마 맞추겠어?"

아이들은 설마 설마 하는 눈치였다. 몇 번의 질문을 거쳐 이경우씨가 '가까스로' 숫자를 맞추자 아이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전까지 어수선하던 분위기는 이내 정리되고, 아이들은 쥐죽은 듯이 눈만 총총히 반짝인 채 마술수업에 열중했다.

이 날은 바로 꾸러기어린이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생활 속 마술' 수업이 있던 날이었다. 꾸러기어린이도서관은 도서관 사서자원활동가 엄마들과 함께 처음으로 겨울방학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동네 엄마들이 선생님이 되던 날,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아이들보다 더 좋아한 것은 사실 엄마들이었다. 내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과도 뭔가 나눌 것이 있다는 것. 말로 형용 못할 보람과 기쁨으로 엄마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꾸러기어린이도서관은 마술수업 이외에 어린이북아트, 역사 속 여행, 빛 그림 동화도 일주일에 한 번씩 진행하고 있다. 덕분에 꾸러기어린이도서관은 일주일 내내 부산스럽다.


월요일이면 어린이북아트를 진행하는 엄마 셋이 모여 도서관에서 열띤 논의가 이루어졌다. 북아트 책을 드려다 보며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만들기를 찾아보고, 직접 만들어보며 수업내용을 짜나갔다.

빛 그림동화는 목소리가 좋은 두 엄마가 진행하게 되었는데, 그림책을 들고 구석으로 가서는 중얼중얼 그림책을 읽는 연습에 열중했다.


목요일 오후 2시 빛 그림 동화가 있던 첫날.

"마이크를 잡으니 이거 갑자기 떨리는데……."

도서관에 불이 모두 꺼지고 그림책 영상이 뽀얗게 아이들 앞에 떴다. 그림책을 읽어주는 엄마들은 마이크를 들고는 책장 뒤로 가서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다.

"훨훨 간다. 권정생 글. 김용철 그림."

첫 마이크를 잡은 강영화(꾸러기어린이도서관 사서 자원활동가)씨의 재미있는 말투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이야기 중 할아버지 집에 담을 넘어들어온 도둑을 묘사한 대목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 아이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강영화씨의 말투를 따라했다.

"성큼성큼 걷는다, 기웃기웃 살핀다. 콕 집어 먹는다, 예끼 이놈!"

훨훨 간다는 것에 이어 여우누이 이야기를 할 때는 채순임씨의 목소리가 정말 여우 목소리 같아서 아이들은 무섭다며 엄마 품에 안겨 이야기를 들었다.

빛 그림동화가 끝나고 함께 프로젝터기와 컴퓨터들을 옮기고, 커피 한 잔을 하며 엄마들은 들뜬 목소리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3년 만에 처음 가져본 겨울방학프로그램. 선생님이 아닌 엄마들이 직접 동네 아이들을 대하는 자리라 엄마들과 아이들은 낯설지가 않다. 작은 동네라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을 자원활동 엄마들은 대부분 알고 있다. 그래서 선생님이란 말보다 아줌마라는 말이 더 편하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친다는 것은 굳이 격식을 차리고 선생님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이들은 언제가 귀를 열 준비가 되어있고 호기심에 넘쳐있는데, 어쩌면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자신의 요구에 아이들의 지적 호기심을 제약한 것은 아닌지.

a 어린이북아트

어린이북아트 ⓒ 이선미

북아트 재료를 붙이는 목공 풀로 글씨를 쓰며 작품을 꾸미는 재민이를 보면서, 어른들이 규정해놓은 각각의 용도가 아이들의 시각에서는 무참히 깨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부디 이번 겨울방학 프로그램이 아이들의 눈에 흥미롭게 다가가기를, 눈높이를 맞추는 자리가 되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도서관에 놓인 아이들이 접은 꼬깃꼬깃한 색종이들을 보면서, 벌써 다음 한 주가 기다려진다.

덧붙이는 글 | '꾸러기어린이도서관'은 춘천시 후평동에 위치한 작은 어린이도서관입니다.

덧붙이는 글 '꾸러기어린이도서관'은 춘천시 후평동에 위치한 작은 어린이도서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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