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13회

등록 2007.01.15 08:41수정 2007.01.15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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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의 반격으로도 그녀의 공격권을 벗어나지 못하자 설중행이 화가 치미는 듯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며 쌍수를 교차시킴과 동시에 쾌속하게 검 집을 낚아채 갔다. 왼손을 쭉 뻗은 것은 위협적이었지만 실상 허초였고, 정작 뒤늦게 기묘한 각도로 검 집을 잡아간 것은 오른손이었다.

"제법이군."


@BRI@교묘한 금나수법이었지만 그것은 여인의 냉랭한 코웃음과 함께 아주 간단하게 파해 되었다. 여인은 검 집을 찌르거나 뒤로 물리지 않았다. 단지 손 관절을 이용해 살짝 비틀자 설중행의 쌍수는 허공을 저었던 것이다. 동시에 그녀는 그 사이의 허점을 노리며 검 집의 끝으로 설중행의 가슴에 있는 급소인 옥당혈(玉堂穴)을 찍어왔다.

"빌어먹을…."

설중행의 입술 사이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오히려 잘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화가 치미는 판에 마침 화풀이 상대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옥당혈을 찍어오는 공격을 도외시한 채 오른손을 뻗어 여인의 목덜미를 잡아갔다. 무모한 것 같지만 그는 자신 있었다.

상대의 공격이 가슴에 닿는 순간 몸을 살짝 비틀어 겨드랑이 사이를 찌르게 한 뒤 그 순간 팔을 밀착시켜 검 집을 옆구리에 끼려 했던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오른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죄면 모든 일은 끝이었다.

허나 그것은 설중만의 달콤한 생각이었다. 여인은 이미 설중행의 의도를 알아챈 듯 검 집의 각도를 왼쪽으로 옮기며 왼손으로 설중행의 오른손과 마주쳐갔던 것이다.


팡--타다닥----!

손과 손이 마주치자 한순간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뒤로 한두 걸음 밀렸다. 설중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방적인 손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익을 본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정말 기분 더럽군. 좋아…."

어깨가 뻐근해 왔다. 여인의 검 집에 스치듯 왼쪽 어깨를 맞은 것이다. 물론 설중행이 손해만 본 것은 아니었다. 그의 왼손에도 여인의 머리칼 한 줌이 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더이상 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진기를 끌어올렸다.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여인의 얼굴에도 여유로움이 사라지고 차가운 기운이 서서히 뿜어지고 있었다.

"그만 해요…!"

그리 큰 목소리도 아니었고, 노여움이 섞인 목소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마치 어른에게 꾸지람을 듣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기를 끌어올리고 있던 두 사람은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에 기운이 쭉 빠지며 더이상 싸울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당신은 가도 좋아요. 하지만 한마디만 더 해야 갰어요."

"듣고 싶지 않소."

"당신은 불행을 안고 사는 사람이에요. 그 불행으로부터 자꾸 피하거나 도망치려고 하면 죽을 때까지 그 불행을 안고 살아야 할지 몰라요. 당신이 그 불행을 떨쳐버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죠."

"듣고 싶지 않다고 했소."

설중행은 노여움이 섞인 목소리로 큰소리쳤다. 허나 우슬은 전혀 그를 의식하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아도 들어요. 당신의 불행은 당신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바로 당신의 그 어리석음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은 당신을 직시하고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예요."

"떠드는 것은 지 마음이지."

무슨 의미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여전히 화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몸을 돌리면서 힐끗 우슬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돌리거나 쳐다보지 않고 있었지만 설중행이 어떠한 행동을 하는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니 그가 몇 발자국 떼었을 때 다시 입을 열었다.

"능대협은 여기 온 목적을 잊어버리고 가버리는 무책임한 사람과는 다르군요."

능효봉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앉아 있는 상태에서 그런 말을 듣자 계면쩍은 미소를 띠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다시 찾아뵈어야 할 것 같소. 저 친구는 떼어놓고 말이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대답은 아주 간단해요. 소녀는 삼 년 전부터 이 운무소축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어요. 매년 어머니와 오빠의 제를 지내러 가는 때 세 번을 제외하고는요."

"그건…, 뭐… 그렇다고 전달하겠소."

말이야 어떻게 하든 내가 흉수요 하는 흉수가 있을까? 그렇다고 우슬이란 저 처자가 흉수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애초부터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터였다. 우슬의 고개가 돌려지며 능효봉 쪽으로 향했다.

"차 맛은 괜찮았나요? 차를 다 드셨나요?"

"서향의 향기가 은은히 배어있어…."

그저 예의상 대답하던 능효봉은 그 순간 마치 둔기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잔에는 마시기 무섭게 나이 어린 시비가 다시 따라놓은 차가 가득 있었다. 능효봉은 언뜻 찻잔과 그녀의 눈을 번갈아 보았다. 보석을 박아놓은 듯한 영롱한 그녀의 눈. 맑고 깨끗한 눈.

"실명(失明)하셨소?"

침음성과 함께 흘러나온 무거운 어조였다. 저렇듯 아름다운 눈이 사물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아요."

비밀을 지켜 달라는 뜻이다. 고의로 그녀는 자신이 실명했음을 능효봉으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었다. 아니 아마 능효봉보다는 설중행이 알기 바랐는지 모른다. 왜 그녀가 시선을 타인과 똑바로 마주치지 않았는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그녀의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막 밖으로 나가려던 설중행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괜히 안타까움과 함께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능효봉이 물었다.

"삼 년 전부터…?"

운무소축을 삼 년 동안 나가보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물은 것이었다.

"아직 완전하게 실명하지는 않았어요. 아주 흐릿하게 윤곽은 알아볼 수 있어요."

"왜…?"

"모르죠. 천형(天刑)일지도 모르고요."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여자의 미소가 저렇듯 아름답고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것이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능효봉은 여자를 절대 믿지 않는 성격이었고, 특히 여자의 미소와 눈물은 개가 물어가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우슬의 미소는 너무나 아름다워 넋을 잃을 정도였다.

천형은 천형인 모양이었다. 하늘은 그녀에게 완벽한 아름다움을 주고는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앗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얼른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황급히 설중행 쪽으로 걸어갔다.

"미안하오. 쓸데없는 호기심으로 깨끗한 곳에 소란을 피웠소. 다시 찾는 일은 없을 거외다."

"아니오. 설공자라면 찾아와야 해요. 반드시 와야 하죠. 어리석게 아직도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싫고, 불행을 업으로 안고 살아갈 생각이라면 오지 않아도 좋아요…."

설중행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우슬을 보았다. 자신에게 공자라는 칭호를 불러 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

문득 다시 오겠다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그냥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뒤따라 나서는 능효봉 뒤로 우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무화(武花) 언니도 이제는 싫어하지 않을 거예요."

아마 흑의무복 여인의 이름이 무화였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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