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15회

등록 2007.01.17 08:30수정 2007.01.1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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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인간에게 빛이 있음으로 해서 절제할 수 있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만용을 부리게 한다. 또 빛이 있음으로 해서 억제했던 돌발적인 충동도 불쑥 솟구치게 되는 것이다. 결코 어둠이 자신을 감추게 하고 보호해 주지 못함에도 말이다.


더구나 어둠은 은밀함이란 속성이 있기 때문에 타인에게 알려서는 안 될 계획이나 모종의 음모가 싹트게 하는데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BRI@운중보에 어둠이 찾아들자 여기저기서 은밀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그 냄새의 색깔은 매우 다양해 맡는 사람에 따라 향기롭거나 지독한 악취가 될 수 있었지만 어느 곳에서도 아직까지 그 색깔은 분명하게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이지?"

두 동이의 술이 비워졌지만 아직 정신들은 말짱해 보였다. 분위기 역시 아직까지 어색한 상태였다. 선화만이 취기로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술을 먹은 것 같지 않았다.

"도대체 무얼 원하는지 알아야 대답을 하건 말건 할 것 아니오?"


능효봉이 술잔을 단숨에 비우더니 능글맞은 웃음을 흘렸다. 능효봉은 술을 마다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식사는 아주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씹어 먹었지만 술은 달랐다. 그는 한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것이 그가 술을 마시는 습관인 모양이었다.

"대체 너는 누구야?"


풍철한이 대뜸 물었다. 눈치를 보고 말을 빙빙 돌려서 뭔가를 캐낼 마음이 없었다. 설중행과 능효봉이 나간 이후 두 시진에 걸쳐 함곡과 대화를 한 이후 그는 매우 심란해져 있었다. 운중보 내에서 돌아가는 사정이 그가 상상했던 것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어지러울 지경이어서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나…? 이미 짐작하고 알고 있는 대로 동창의 쓰레기들이 모인 비영조의 일조 조장이오. 나라야 어떻게 되든 불알 없는 놈들이 명령을 내리면 우국충신(憂國忠臣)들 조차도 죽여야 하는 개같은 존재 말이오."

그래도 당장 할 일은 능효봉과 설중행의 정확한 정체를 아는 일이었다. 그의 머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 두 놈의 정체를 속 시원히 알아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래야 함곡이 생각한 아주 엉뚱한 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혈간을 죽인 것도 맞지?"

"명령이었소. 항상 비영조에 명령을 내리던 신태감은 모르고 있었다지만 말이오."

명백한 시인이었다. 능효봉 역시 이제는 더이상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서당두가 명령을 내린 것인가?"

"서당두가 내린 것은 분명하오. 하지만 그에게는 혈간을 죽이라고 할 만큼 큰 권한은 없소. 그는 언제나 전달자였소.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전달하는 위치였을 뿐이오."

"그런데 왜 서당두를 죽인 거야?"

"나는 죽이지 않았소."

대답은 아주 모호했다. 자신이 죽인 것은 아니라는 뜻은 분명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간접적으로 자신과 관련이 있다거나, 아니면 서당두를 죽인 자를 알고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왜 죽였지?"

"많이 알고 있는 자는 위험한 법이오. 나는 서당두가 죽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있소."

"우리는 이제 서로 솔직해 지고 있군. 흉수가 누군지 가르쳐 주고 싶지 않겠지?"

"그거야 풍형이 해야 할 일 아니오? 누군가가 바로 가르쳐 주면 재미없잖소?"

알 듯 모를 듯한 능효봉의 말에 풍철한은 아주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풍형…? 그거 괜찮군. 개에나 줘 버려야 할 대협이란 칭호보단 확실히 나은 것 같아."

풍철한은 비어 있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러다 능효봉의 잔이 빈 것을 보고는 그쪽에도 역시 따라주었다.

"좋아…, 그 문제는 넘어가지. 자네 말대로 누군가 쉽게 가르쳐주면 재미없지. 하지만 말이야…."

풍철한은 잔을 들어 능효봉 쪽으로 향했다. 이제 마음을 터놓고 마셔보자는 의미다. 능효봉 역시 거침없이 두 손으로 잔을 감싸듯 들어 풍철한을 향해 예를 취하고는 시선은 풍철한에게 둔 채로 입에 댔다.

"한 가지는 반드시 짚고 넘어 가자구. 그래 그 쓰레기 같은 비영조의 일조 조장 말고 또 다른 자네는 도대체 누구지?"

"컥----!"

풍철한의 말에 넘어가던 술이 목에 걸렸는지 능효봉이 기침을 해대기 시작했다. 손으로 급히 입을 막았지만 옆으로 술이 튀었다. 지독한 사fp가 들렸는지 얼굴까지 벌겋게 변했다. 옆 자리에 있던 설중행이 능효봉의 등을 몇 번 쳐주자 조금 가라앉았는지 과장스럽게 호흡을 크게 내쉬었다.

"거 왜 엉뚱한 말은 해서 사레 들리게 하는 거요…? 커--컥---"

능효봉이 말을 돌리려 하자 풍철한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능효봉 같이 능글맞은 인물이 사레가 들릴 정도면 바로 정곡을 찌른 말이다.

"선뜻 대답하기 싫은 모양이지? 그럼 한 번 쉬어 가자구…. 그럼 여기 왜 들어왔어? 무슨 목적이냐구?"

"쿨럭----컥----! 숨 좀 돌립시다. 이거 대답하기 싫은 질문만 해대니…."

능효봉은 술 대신 찻잔의 물을 훌쩍 마셨다. 짧은 순간이나마 생각할 시간이었음이 틀림없었다. 그는 사레 들린 가슴을 진정하는 듯 물을 천천히 마시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뭐… 어쩌다 보니 들어오게 되었다는 따위의 소리는 하지 않겠소. 이곳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들어온 것이고…."

그때였다.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함곡이 불쑥 물었다.

"누구의 지시로 인한 것이오?"

능효봉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시선을 천천히 풍철한에게서 함곡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함곡의 눈이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제 진정이 되셨소? 나와 한 잔 나누시겠소?"

함곡이 술병을 들어 능효봉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는 반쯤 남은 자신의 잔을 채우고는 두 손으로 치켜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할 수 없이 잔을 들어 예를 취하는 능효봉의 얼굴에는 망설임과 불안한 표정이 엇갈렸다.

하지만 그는 금방 될 대로 되라는 표정과 함께 미소를 지으며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함곡 역시 술 한 잔을 단숨에 비더니 말을 툭 던졌다.

"능대협은 필시 보주의 팔숙(八宿) 중 한 분이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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