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각잡기 원문이정근
그렇다면 초야에 묻혀있는 야인들이 집성한 야사는 어떨까? 이색의 금릉행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기에 뒷얘기도 풍부하다. '동각잡기' '연려실기술' '필원잡기' 등에 이색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같이 비판적이다.
여기에서 잠간, 왕관(王官)을 짚어보자. 왕관이라 함은 명나라 황제의 특명을 받은 명나라 조정의 관리로서 고려에 파견되어 고려의 국왕을 감독하는 관리를 일컫는다. 현대적인 의미의 대사와는 격이 다르다. 왕위의 왕이며 옥상옥(屋上屋)이다. 명나라의 악의적인 운영에 따라서는 신탁통치도 가능한 위험한 제도이다.
등저우에서 배에 몸을 실은 방원은 망망대해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황제가 정사의 주청을 받아들여 친조를 명하고 왕관을 파견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가? 황제의 명을 봉행하기 위하여 대동강 이북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하겠다고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왕관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명나라 군대를 수도 개경에 주둔시켜야 하겠다고 나오면 어떠한 명분으로 거절할 수 있단 말인가?"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고려반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원나라와 패권을 가르는 북방전투에 몰두하고 있어 다행이지 아찔한 순간이었다. 방원은 평소 이색을 아버지의 정적을 떠나 나라의 큰 어른으로 존경했다. 성리학도의 한사람으로 이색의 깊은 학문에 매료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존경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바다를 바라보며 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난세의 외교술, 과연 어떤 것이 애국일까?
"신라가 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외세를 끌어들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대동강 이북 영토를 내 주어야 하는 쓰라림을 당하지 않았는가? 잃어버린 그 영토를 찾아오기 위하여 천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지 않았는가? 오늘날 명나라로부터 철령위를 세워야겠다는 협박을 받는 수모도 모두가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은가?"
바람이 분다. 수평선 너머에 먹구름이 밀려온다. 뱃전을 노닐던 갈매기 떼가 자취를 감추었다. 배가 심하게 요동친다. 일엽편주(一葉片舟)란 이를 두고 한 말인가. 조각배를 삼킬 듯이 파도가 밀려온다. 바다위에서 역사의 바다를 주유하던 방원은 두려움도 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아이가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인륜의 덕목이지 않은가? 소국이 대국을 공경하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만약 국가를 경영하는 통치자가 된다면 내실을 튼튼히 하여 국력을 기른 다음에 대등한 위치에서 상응한 외교를 해야겠다. 대국을 공경하드래도 민족의 자존을 지키며 사대하고 국력을 기른 다음에 맞대하여야 이러한 낭패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사신 일행이 탄 배가 반양산(半洋山)을 지날 무렵이었다. 천기를 어지럽혀 하늘이 노(怒)했을까? 약관을 갓 넘긴 21살 풋내기가 언감생심 국가경영 운운하는 불충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어 바다가 노한 것일까? 사신 일행이 탄 배를 향하여 집채 만 한 파도가 밀려왔다. 폭풍을 동반한 파도 앞에 조각배는 뒤집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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