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밖에 못하는 미국?

오영인씨의 논문 '백인 미국 만들기' 소개

등록 2007.01.19 11:00수정 2007.01.19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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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미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부른다. 출신국에서의 학력·경제력·지위에 관계없이 미국에서는 누구나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부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합법적 혹은 불법적으로 미국의 문을 애타게 두드리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는 명제에 대해서 한번쯤 의심을 품어 보는 게 바람직할 듯하다. 그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의미 있는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BRI@그 사회적 변화라는 것은 미국에서 영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한 주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1986년 캘리포니아주 의회가 영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한 이래, 현재까지 25개 이상의 주 의회에서 영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였다. 영어가 미 연방의 공식 언어로 지정된 것은 아니지만, 과반수의 주에서 영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고 있기 때문에 영어는 사실상 미국의 공식 언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미국에서 영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주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그러한 추세는 이민자들에게 어떤 실질적 영향을 주는 것일까?

영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많은 주에서는 “영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함으로써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고 미국인으로서의 단일성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려면, 과거의 유사한 선례를 살펴보고 그 시대에 그런 현상이 어떤 사회적 영향을 낳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이를 위해 2006년 12월 31일에 수선사학회(이원명 서울여대 사학과 교수)가 발행한 <사림> 제26호에 오영인 씨(미국사 연구자)가 기고한 '백인 미국(White America) 만들기 - 뉴욕주의 영어능력평가 선거법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논문은 1921~66년의 45년 동안 존속했던 뉴욕주의 영어능력평가 선거법의 목적·내용·효과·변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 법이 외국인 이민자들에게 어떤 정치적·사회적 영향을 끼쳤는가를 분석한 글이다.

참고로, 이 논문에서는 ‘영어능력평가 선거법’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지만, 실제로 그런 명칭의 선거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뉴욕주 선거법에 ‘영어능력평가’를 통해 투표권을 규제하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에 편의상 그런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 시기의 미국에서는 뉴욕주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주에서도 영어 가능자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이 시행되고 있었다. 마치 1986년 이후의 여러 주에서 영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는 것과 비슷한 경향이 1920년대의 미국에서도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뉴욕주의 1921년 영어능력평가 선거법에 대한 이 논문을 살펴봄으로써, 최근의 영어 공용화 흐름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논문의 주요 부분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원래의 논문을 평이하게 재구성함과 동시에, 논문 저자의 취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필요한 해설을 덧붙였음을 밝혀 둔다.

미국의 초기 이민정책은 개방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초기의 경제개발과 서부개척을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의 일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전쟁(1861~65년)을 전후하여 본래의 백인 앵글로색슨계 이외의 다른 세력들이 점차 정치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새로운 세력의 정치 참여를 막기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들이 고안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시행되었던 영어능력 테스트(English Literacy Test)와 문맹 테스트(Literacy Test)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1850년대에 실시된 영어능력 테스트는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에서 실시된 제도로서, 새로이 참정권을 갖게 된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정치권에서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남북전쟁 이후 남부지역에서 실시된 문맹 테스트는 헌법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흑인의 투표권 행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 외에도 서부에서는 중국인들의 정치참여를 막기 위하여, 와이오밍에서는 핀란드인들을 막기 위하여, 알래스카에서는 인디언들을 막기 위하여, 또 캘리포니아와 텍사스에서는 멕시칸-아메리칸들을 막기 위하여 영어 테스트가 실시되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의 영어능력 테스트는 처음부터 백인 앵글로색슨계가 아닌 사람들의 정치 참여를 막기 위해 실시된 것이었다.

투표권을 ‘보유’한 사람일지라도 영어를 모르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헌법에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새로운 이민자들의 정치 참여를 막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와 20세기의 전환기에 미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이민자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오는 이민자들은 주로 ‘선진적인’ 북서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부터 ‘후진적인’ 유럽 남동부 쪽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미국의 백인 기득권층은 유럽 남동부 출신의 ‘후진적인’ 백인들로부터 자신들 같은 ‘선진적인’ 백인들을 구별하기 위하여, 미국인의 정체성을 백인 앵글로색슨계 개신교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로 규정하기 시작하였다. 이 와스프(WASP)는 와스프가 아닌 백인들을 포함한 기타 소수민족들을 미국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규정하고, 나아가 이들이 선거참여를 통해 국가에 악영향을 끼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백인 기득권층이 얼마나 위협을 느꼈는가 하는 점은 1920년 미국교육협회 입법이사회 의장 스트레이어(George D. Strayer)의 보고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20년 현재 10세 이상의 외국인 중에서 영어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자들이 150만 명을 넘는다”면서 “이런 사람들을 정치에 참여시킨다는 것은 미국 정치발전에 치명적인 위협”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1920년에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인정하는 헌법개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백인 남성 기득권층의 위기감은 한층 더해지게 되었다.

이런 상황 하에서 1921년 뉴욕주 의회 선거에서 보수적인 공화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화당은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소수 이민자들을 정치참여로부터 배제하기 위하여 선거법 개정에 착수하게 되었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21년에 뉴욕주의 선거법이 개정되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뉴욕주뿐만 아니라 20개 이상의 주에서 유사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뉴욕주의 선거법은 당시 표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뉴욕주 선거법의 관련 조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22년 1월부터 영어를 읽고 쓸 줄 모르면, 이미 귀화하여 국적을 취득하였더라도 선거권을 갖지 않는다. 단 장애인은 예외다.”

이렇게 하여, 뉴욕주에서는 영어를 모르는 유권자들을 투표에서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23년의 개정 선거법에서는 영어능력 테스트를 교육위원회 및 선거위원회에서 실시할 수 있도록 한 종래의 규정을 없애고, 교육위원회에서 테스트를 전담할 수 있도록 일원화하였다.

개정된 법률에 따라, 교육위원회가 실시한 영어능력 테스트에 합격하였다는 증서를 제출하거나 혹은 영어로 수업이 이루어지는 학교에서 8학년 이상 교육을 받았다는 증서를 제출한 사람만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교육위원회가 실시한 영어능력 테스트의 문제를 보면, 이 시험에 통과하는 것이 얼마나 ‘까다로운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가 ‘어려웠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면 그만이겠지만, 그게 아니라 문제가 교묘하게 ‘까다로웠기’ 때문에 단순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당시 뉴욕주 교육위원회에서 출제한 문제 중에 “미국의 정부형태는 무엇인가?”라는 항목이 있었다.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미국 하면 ‘민주주의 국가’를 떠올린다. 당시의 미국 이민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 “민주주의 국가”라고 답하면 틀린다. “공화국”이라고 답해야 정답이다. 정치체제와 정부형태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정치교육을 받은 사람이라야만 제대로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출제된 것이다.

이렇게 까다로운 문제들이 출제되었기에 1928년에는 거의 7천 명이 넘는 응시자가 뉴욕에서 불합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뉴욕의 유권자 중에서 10% 이상이 아예 영어능력 테스트를 포기하였다고 한다. 이 테스트를 포기한다는 것은 선거권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그럼, 이러한 선거법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당시 뉴욕에는 이디시 언어를 쓰는 백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과, 갓 투표권을 받은 20만 이상의 문맹 여성들이 있었다. 이들이 영어능력 테스트를 통과하여 투표권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 그러므로 1920년대 초반의 뉴욕 선거법은 당장에 이들을 선거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시간이 흘러 뉴욕 시민들의 영어능력이 향상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이후의 문제였다.

그리고 뉴욕의 선거법이 애초부터 어떤 의도를 갖고 있었는가 하는 점은 1923년 3월 13일자 <요커스 스테이트스맨>에 실린 뉴욕주 이민자 교육부 담당자인 윌리엄 스미스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뉴욕 선거법의 목표는 모든 외국인의 귀화를 돕고 그들에게 미국의 이념과 이상을 교육시켜 미국인으로서 미국의 중요한 정치제도를 움직일 수 있는 훌륭한 시민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 나라를 운영할 가치가 있는 앵글로색슨족의 시민들만을 선별하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뉴욕 선거법의 목표가 “앵글로색슨족의 시민들만을 선별”하고 소수 이민자들을 배제하는 것임을 아주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다.

1966년에 인권운동의 영향으로 결국 폐지되기 전까지 뉴욕주 선거법은 뉴욕 내에 있는 소수 그룹을 정치적으로 배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주의 선거법에도 영향을 주어 미국 전역에서 푸에르토리코·중국 출신 등 소수민족 이민자들을 정치적으로 배제하는 효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백인 중심의 미국을 만드는 데에 제도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러므로 영어능력 테스트는 유권자들의 영어능력을 향상시킨다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비(非)와스프 소수민족이 투표장에 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제도였던 것이다.

이상이 논문의 주요점이다.

1921~1966년의 45년간 존속했던 뉴욕주 선거법이 그 표면적인 목표와는 달리 영어 가능자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함으로써 소수민족의 정치참여를 막는 장치로 기능하였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미국 사회와 관련하여 어떤 시사점을 던지는 것일까?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1980년대 중반 이후로 현재까지 과반수 이상의 미국 주에서 영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하고 있다. 1920년대의 상황과는 다소 양상을 달리하지만, 한 가지의 공통점은 국가가 이민자들에게 영어를 강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영어에 능숙할 수밖에 없는 백인 그룹에게는 유리한 반면, 태생적으로 영어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소수 이민자 그룹에게는 불리한 것이다.

이처럼 외국 출신 이민자들에게 점차 불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미국이 과연 ‘기회의 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미국에서 이민자들이 과연 ‘아메리칸 드림’을 꿈꿀 수 있을까? 어찌 보면, 아메리칸 드림이란 처음부터 와스프 계열의 백인 그룹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만 기회의 땅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 하여 제3세계 국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미국. 인류의 보편적 이념을 행사한다며 세계 경찰로 자부하고 있는 미국. 그러나 그 미국은 실제로는 앵글로색슨족 백인들의 기득권에만 집착하여 자신들의 것을 외국 출신들에게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는 나라에 불과하다.

미국이 점차 이기적이 될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에게 각종 부담을 떠넘기는 이유 중의 한 가지를 이로부터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미국 경제가 최근 힘들어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미국이 처음부터 앵글로색슨족 백인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때는 남들에게 후하게 보였던 미국이 이제 자신들이 살기 힘들어지자 드디어 그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때는 영어능력으로 투표권을 제한하였다가 이제는 아예 영어를 주의 공식 언어로 지정하고 있는 ‘영어밖에 못하는 미국’이 과연 영어를 쓰지 않는 다른 나라들을 지도할 만한 정신적 능력이 있을까? 영어만을 강제하는 ‘백인 미국’이 만들어 가는 세계질서는 결국 ‘백인 세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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