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천무후릉에 보물 500톤 묻혀있다"

[해외리포트] 중국 역사학계, 발굴 여부 놓고 뜨거운 논쟁

등록 2007.01.21 10:28수정 2007.07.0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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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에 두 봉우리의 산을 안은 듯한 첸링의 센다오대로. ⓒ 모종혁

@BRI@중국 내륙 산시(陝西)성의 수도인 시안(西安) 서북쪽 85㎞ 떨어진 첸현. 이 곳 드넓은 관중평야지대에 거대한 무덤이 마치 산처럼 솟아있다.

자동차 주차장에 내려 3㎞ 남짓한 센다오대로를 걸어 올라가야 겨우 찾을 수 있는 곳. 해발 1047.4m의 당나라 최대 황제릉인 첸링(乾陵)은 기세가 당당하고 규모가 웅장해 찾는 이를 압도한다.

첸링은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성 황제로 본래 이름이 무측천인 측천무후(則天武后)와 그의 남편인 당 고종이 묻혀 있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두 황제가 함께 잠들어있는 합장묘이자, 진시황릉과 더불어 중국 내에서 도굴당하지 않은 채 완벽하게 보존된 황제릉인 첸링.

최근 첸링의 발굴을 둘러싸고 중국 역사학계에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5일 산시성 고고학연구소가 정교한 탐측기구를 동원한 조사 결과를 통해, "첸링에 능묘와 함께 지하궁전(下宮)이 존재하며 이곳에는 각종 진귀한 보물과 문물, 유물 등이 최소 500t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하여 중국이 들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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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촨성 광유안 황쩌스(皇澤寺) 안에 모셔진 측천무후동상. 광유안에서 측천무후는 불교의 보살과 같은 숭배와 신앙의 대상이다. ⓒ 모종혁

태조의 후궁에서 고종의 황후로, 다시 황제로

1300여년 전 당시 세계 최대 대제국인 당나라를 일시 폐하고 자신의 왕조인 주나라를 개국한 무측천. 그는 오늘날 극단적인 평가가 엇갈리는 여황제이다.

624년 쓰촨성 광유안에서 태어난 무측천은 14세 때 태종의 후궁으로 발탁되어 황궁으로 들어간다. 태종이 죽자 당황실의 전통에 따라 다른 후궁과 함께 비구니가 되었으나 태자 시절부터 자신을 흠모한 고종에 의해 환속되어 총애를 받는다.

총명한 두뇌와 능수능란한 정치술로 655년 황후에 오른 무측천은 오랫동안 병석에 누운 고종을 대신하여 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당나라는 철저한 귀족 위주의 계급사회였는데, 무측천은 정치와 경제를 독점했던 귀족층을 배척하고 출신을 불문하여 능력이 뛰어난 신진관리들을 등용했다.

683년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인 중종, 예종을 차례로 즉위시켜 꼭두각시로 삼은 무측천은 자신에 반대하는 황족과 귀족세력을 가차없이 탄압하고 죽였다. 탄압에는 자신이 낳은 자손들도 비켜가지 못했다.

무측천은 690년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에 오르는데, 적인걸·위원충 등 명신들을 등용하고 적절한 재정정책과 농경장려로 국가경제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이 때 다져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와 풍성한 경제기반, 중용된 신진관료들은 705년 무측천 사후 복원된 당나라가 현종의 태평성대인 '개원의 치'를 다지는 초금석이 된다.

잔혹무도하고 음란한 암탉이라고?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 황제나 왕은 용납되지 않는다. 무측천은 240여명의 중국 역대 황제 중 한 명임에도 훗날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비판적이었다.

특히 "암탉은 새벽을 알리지 못하고 암탉이 새벽을 알리면 가정이 망할 때뿐이다"(상서)는 유교적 제왕학이 자리를 잡은 송나라 이후 무측천은 "가혹한 관리를 임용하여 잔인한 정치를 한 역사상 가장 흉악한 사람"으로 폄하되며 '무후'로 깎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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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한 평가를 후대에 남긴다는 의미에서 석문에 없는 무측천 공덕비인 '무자비'. 본래 글자가 없었던 '무자비'에는 후세 사람들에 의해 '유자비'가 되어 버렸다. ⓒ 모종혁

이는 오늘날도 다르지 않아 무측천은 권력욕 때문에 아들·딸까지 죽이고 손자까지 없앤 잔혹무도한 패륜여성으로 평가된다. 늙어서 어린 남창과 음란한 생활을 하고 각종 해괴한 건강 및 피부 보양법을 사용한 것으로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린다.

무측천이 권력욕의 화신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정당한 절차에 따라 황제로 등극하고 황제가 될만한 비전을 갖추고 통치력을 발휘했다.

대담하고 치밀한 계획으로 중국을 호령한 무측천의 업적은 역대 어느 황제와 겨누어도 뒤지지 않는다. 근 50년의 통치기간동안 농민봉기가 단 한 차례도 일어나지 않았고 민중생활은 안정되었으며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관료가 될 수 있었다.

1993년 산시사범대학 역사학과 자오원룬(趙文潤) 교수가 쓴 <무측천 평전>(한국에서는 2004년 발간)은 중국 정사인 <구당서> <후당서> <자치통감> 등을 철저히 고증, 분석하여 측천무후를 재평가했다.

자오 교수는 "무측천은 모친상에도 3년간 상복을 입게 하고 여성을 광대로 희롱 못하게 하며 황제 즉위후 자식들의 성을 무씨로 바꾸게 할 정도로 여성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하고 기존체제와 통념에 도전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강력한 지도력으로 치밀하고 대담하게 반대파를 제압하고 관료와 민중을 일사불란하게 통솔하여 개혁을 추진했다"면서 "무측천 통치기의 당나라는 한나라 이후 중국 역사상 제2기의 황금시대를 구가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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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잘려나간 외국 사절상. 일설에 의하면 자신의 석상이 죽은 황제릉에 세워지는 것을 꺼려한 각국 사절들이 몰래 석상 머리를 잘라갔다고 한다. ⓒ 모종혁

보물 천국 첸링 지하궁전, 왜 발굴 안하지?

무측천 사후 고종의 능원에 더해져 건설된 첸링은 무측천 통치기 당나라의 국력이 얼마나 번성했는가를 보여준다.

첸링에는 거대한 지하궁전이 있고 여기에 800억위안(약 9조6000억원) 상당의 진귀한 보물들이 매장된 것으로 1990년대에 이미 밝혀졌다. 이번에는 좀더 진전된 수치인 500t의 유물이 잠들어 있는 것으로 확인됐는데, 이는 당시 국가 재화의 3분 1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중국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첸링에는 고종과 무측천이 평생동안 모은 중국 역대 국보급 문화재와 금은보화가 매장되어 있다. 특히 고종은 생전에 소중히 간직했던 서예대가 왕희지의 '란정서'(蘭亭序)를 비롯, 오늘날 멸절된 무수한 서화를 함께 묻히도록 했다. 란정서는 현재 원본이 발견되지 않은 채 모조품만 1만 300여 종 출몰하는 명품 중의 명품이다.

첸링의 지하궁전을 발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1958년 시안과 란저우 구간의 도로공사 발파작업을 하면서 현지 농민들이 지하궁전으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우연히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산시성 문화국은 1960년 첸링 발굴계획을 수립, 발굴팀이 첸링에 들어가려 했지만, 당시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우리 시대에 좋은 일을 모두 완성할 수 없다"며 발굴을 무산시켰다.

1973년 역사학자이자 문학가로 무측천을 재평가한 소설을 썼던 궈모뤄(郭沫若)는 다시 첸링의 발굴을 건의했다. 허나 저우 총리는 당시 발굴기술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향후 10년 동안 첸링을 열어선 안된다"고 강력히 반대, 발굴계획은 오랫동안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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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링과 더불어 중국 내에서 유일하게 도굴당하지 않은 채 보존된 진시황릉. ⓒ 모종혁

"계속 놔두면 훼손"-"지하기반에 문제 없다"

산시성 고고학연구소는 지난 15일 "첸링 동·북·서문의 이음역학을 통해서 지하궁전의 구조와 규모를 밝혀냈다"며 "궁전 안의 문물은 500t에 달하고 궁전 내에는 공간의 70%를 차지하는 부장품이 잠들어 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 뒤 산시성 당제왕릉연구실 스싱방 주임을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당장 첸링을 발굴할 것은 촉구했다. 스 주임은 "첸링이 자리잡은 량산(梁山)이 카스트 지형으로 지표수가 쉽게 스며들어 지하궁전 환경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며 "오늘날 첨단기술로 안전히 발굴한 뒤 출토된 유물을 궁전과 같은 환경의 표본실에서 보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스 주임은 1987년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비롯 당황실의 진귀한 보물들이 쏟아져 나온 파먼스(法文寺) 지하궁의 발굴을 주도했다. 그는 "지하 속 문물을 계속 놔두면 훼손당한다"면서 "파먼스 발굴시에도 지하궁 내부의 서적과 문서는 모두 썩었고 비단도 원형이 훼손됐다"고 밝혀 일부 언론매체와 적지않은 네티즌의 성원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베이징대학 고고학자인 왕쉰, 자오화청 교수 등 주류 역사학계는 "첸링의 지하기반은 아무런 문제가 없고 지표수가 들어간 흔적도 없다"며 "철저한 발굴과 문물 보존의 기술문제가 해결됐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반박했다.

이들은 작년 10월 각종 곰팡이균에 의해 침식현상이 심각한 것으로 밝혀진 진시황 병마용의 사례를 예로 들며 우려했다. 또한 "일손이 달려서 추정 유물의 20% 밖에 건지지 못한 싼샤댐 수몰지역의 전철도 있고 남수북조 등 거대한 프로젝트로 훼손 위기에 직면한 역사유물 추정지가 1000여 곳에 달한다"며 첸링의 발굴은 급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주류 역사학계는 2000년 산시성 정부가 첸링 발굴후 해마다 500만명의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다고 발표한 보고서를 근거로 제시하며, "지방정부와 일부 학자들이 눈앞의 이익과 호기심, 성취감, 시대분위기 등을 이용해 자신들의 '사심'을 달성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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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산과 같은 첸링, 이 밑 지하궁전에는 무측천, 고종과 더불어 진귀한 보물들이 잠들어 있다. ⓒ 모종혁

완벽한 유물 보존이 선행돼야

첸링 관리를 담당하는 첸링박물관 친젠밍 주임은 "이번 발표결과는 새로운 고고학 조사법을 동원한 연구일 뿐이지 발굴 의도와는 무관하다"며 "현재 과학기술로는 안전한 발굴과 완벽한 보존이 요원하여 앞으로 계속 연구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17일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도 "국가문물국은 여러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은 한 현시점에서 첸링의 발굴을 고려하지 않는다"며 작금의 논란과는 상관없이 발굴 계획이 없음을 시사했다.

첸링의 유물들이 세상에 드러나면 중국 역사와 세계 고고학사는 다시 쓰여져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원형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채, 발굴될 유물의 완벽한 보존대책이 없는 채 발굴에 나서는 것은 또 다른 역사의 훼손이다. 첸링은 중국만의 유적이 아닌 인류 전체와 후손들의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첸링 #측천무후 #진시황릉 #지하궁전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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